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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두 운하 이야기

등록 2014-11-11 18:48수정 2014-11-11 20:46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파나마 북쪽 니카라과도 대운하를 건설하려 한다. 왕년의 반미 혁명가 오르테가 대통령이 중국계 회사에 운하건설 대가로 국토 사용권을 50년 동안 주었다. 제대로 된 논의도 없었다. 첫 삽을 뜨기도 전에 토지수용 대상 지역 농민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주권 회복, 다른 한편으로 빈곤문제 해결의 상징인 두 운하. 우리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형태를 달리하면서도 보편적으로 발현되는 억압권력의 실체에 주목해야 한다. 억압권력은 때론 주권 침해로, 때론 불평등으로, 때론 약자 탄압으로, 때론 환경 파괴로 나타난다.

두개의 운하가 있다. 하나는 현존하는 운하, 또 하나는 만들어질 운하다. 하나는 올해 100년 되었고, 또 하나는 올해부터 파기 시작한다. 하나는 달러를 공식 통화로 사용할 만큼 미국과 가까운 나라, 또 하나는 미국과 사이가 안 좋은 나라에서 만든다. 하나는 중국 노동자들이 닦은 철도를 이용해 건설했고, 또 하나는 중국의 자금으로 건설한다. 둘을 묶는 공통분모는 국가 발전 명분으로 모순적인 현실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전자는 파나마운하, 후자는 니카라과운하다.

파나마는 요즘 잘 풀리는 나라로 꼽힌다. 파나마시티는 여느 중남미 도시와 많이 다르다. 눈부신 마천루들이 뉴욕의 맨해튼이나 중국의 상하이를 연상케 한다. 부지기수의 호텔과 카지노들, 그리고 초대형 쇼핑센터들이 즐비하다. 운하 덕이 크다.

파나마는 원래 콜롬비아에 속했다가 20세기 초에 미국의 지원하에 독립했다. 미국은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파나마의 토지사용권을 사들였다. 십년 공사 끝에 1914년 8월15일 마침내 운하가 완공되었다. 대서양과 태평양이 한 물길로 만난 것이다. 파나마운하로 세계 무역이 크게 변했다. 매년 전세계 교역량의 6%, 물동량 4억t이 운하를 통과한다. 미국으로부터 운하를 반환받은 뒤 파나마가 벌어들이는 사용료가 연간 25억달러에 이른다. 국가의 젖줄이다.

파나마운하는 처음부터 말썽이 많았다. 미국의 통제권을 인정한 1903년의 조약은 문제투성이였다. 운하를 건설하면서 인종차별까지 발생했다. 같은 일을 해도 미국과 북유럽 출신들은 ‘골드’반으로 분류되어 달러로, 서인도의 유색인종과 남유럽 출신은 ‘실버’반에 속해 페소화로 임금을 받았다. 또한 파나마운하지대의 문제가 있었다.

파나마운하지대란 운하를 중심으로 양쪽 8㎞까지 땅을 미국이 직접 점거, 사용, 통제한 지역을 말한다. 파나마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광대한 국토, 서울의 2배 이상 되는 땅이 사실상 미국 영토였다. 1904년부터 1979년까지 미연방 정부가 파견한 총독 23명이 파나마운하회사 사장을 겸하면서 이 지대를 다스렸다. 행정조직, 법원, 경찰, 방송국, 우체국, 전용 마트, 극장, 학교, 거주타운이 있었고 미국인 4만5000명이 살았다. 자체 우표와 기, 게다가 미군 보병 여단까지 주둔했다. 운하지대에서 태어나면 미국 시민권이 주어졌다. 파나마 국민들은 평상시 운하지대 출입은 가능했으나 상점과 편의시설은 이용할 수 없었다. 운하지대 인근에서 파나마 국기를 내걸 수도 없었다. 파나마인들의 불만이 높았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케네디 대통령이 운하지대에서 두 나라 국기를 함께 게양하게 했지만 미처 시행을 못 한 채 암살당했다. 그 뒤 총독이 고육책을 냈다. 양국 국기를 모두 게양하지 말자고 한 것이다. 그러자 이번엔 운하지대 미국인들이 들고일어났다. 파나마의 눈치 때문에 미국의 주권을 양보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이들은 운하지대 내 발보아고등학교에 몰려가 성조기를 게양했다. 반세기 전인 1964년 1월9일에 일어난 일이다.

이 소식을 들은 파나마 학생 수백명이 학교로 달려가 자기들도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겠다고 요구했다. 학생들이 들고 간 깃발은 오래전부터 중요 행사에서 사용하던 것이었다. 밀고 당기는 충돌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파나마 국기가 찢겨 나갔다. 소요가 계속되자 미국 경찰이 최루탄을 쐈고 학생들은 평소 ‘수치의 벽’이라 부르던 경계담장을 무너뜨렸다. 경찰이 급기야 발포를 했다.

소요사태는 이틀간 계속되었다. 시위대는 미국계 시설을 파괴했다. 팬암 항공사 건물이 전소되었고, 끝내 미군이 출동하여 유혈진압에 나섰다. 결과는 참담했다. 파나마 쪽 21명, 미국 쪽 4명, 도합 25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제2의 쿠바사태를 염려한 미대사관은 주요 문서를 소각하고 철수에 대비할 정도였다. 미 언론에는 공산당의 사주를 의심하는 논조도 등장했지만 사실무근인 오보였다.

최초 사망자는 아스카니오 아로세메나라는 스무살의 학생이었다. 친구들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치료를 돕다 총에 맞은 것이다. 생후 6개월짜리 여자아이가 최루탄에 질식사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파나마의 현대사가 완전히 달라졌다. 파나마는 한때 미국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수에즈운하처럼 파나마운하도 당장 국유화하라고 촉구했다. 파나마에선 매년 1월9일을 ‘순교자의 날’이라는 국경일로 지낸다. 사건 현장으로 가는 길은 아스카니오 아로세메나 대로가 되었고, 학교는 파나마운하청 직원들을 교육하는 아스카니오 아로세메나 연수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필자가 파나마에 도착해 제일 먼저 찾은 곳이 연수원이었다. 현관 입구에 열사들 이름이 새겨진 21개 기둥이 둥글게 모인 노천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중간에 놓인 향로에서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불길이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고 있었다. 파나마운하를 통과하는 모든 배는 파나마운하청 소속의 선장에게 선박 지휘권을 넘기게 되어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파나마운하에서만 실시하는 제도라 한다.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학교에서 교육받는 선장들의 자세가 어떨까 상상해 보았다. 카스코에 있는 역사박물관에선 입구에서부터 이 사건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었다.

충돌사건을 계기로 미국의 파나마 정책은 급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카터 행정부는 1979년에 운하지대 통제권을 포기했고, 1999년까지 미국과 파나마가 운하를 공동관리하다 2000년부터 파나마가 단독 운영하고 있다. 하지만 반환 조건을 명시한 조약에 따르면 파나마운하는 지금도 형식적으론 중립지대이고, 미국의 사용권이 위협받을 때엔 군사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매년 군사훈련이 실시된다.

운하를 돌려받고 파나마의 경기가 좋아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한 빈부격차로 전 국민의 40%가 빈곤층인 어두운 현실이 존재한다. ‘로스라비블랑코스’라 불리는 태평양 쪽 파나마시티의 백인 엘리트들은 흥청거리지만, 대서양 쪽 입구의 콜론시는 불과 80㎞ 떨어진 곳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높은 실업률, 범죄율, 슬럼화로 신음 중이다. 그리고 만명에 달하는 운하청 직원들에게 파업권리가 없는 문제가 계속 노동 현안으로 제기되어 있다. 파나마운하 개통 100주년의 모습은 이렇게 극과 극으로 나타난다.

파나마보다 북쪽에 있는 니카라과도 대운하를 건설하려 한다. 파나마운하보다 운항거리가 훨씬 짧아진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부패 혐의를 받는 왕년의 반미 혁명가 다니엘 오르테가 대통령이 중국계 회사 홍콩니카라과운하개발투자공사(HKND)에 운하건설 대가로 국토 사용권을 50년 동안 넘겨주었다. 국민들과 제대로 된 논의도 없었다. 올해 말부터 500억달러짜리 공사가 시작된다. 하지만 첫 삽을 뜨기도 전에 토지수용 대상 지역의 농민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3만명이 강제이주될 예정이다. 농민 수천명이 “노 치노스”(중국인 물러가라), “운하 필요 없다, 그냥 농사짓고 살게 해 달라”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수심 가득한 시골 할머니가 울먹이며 부르짖는 모습이 밀양 할머니의 얼굴과 겹쳐 보인다.

현재 이 건은 미주인권위원회에 제소되어 있다. 오르테가 대통령은 인구 600만명 중 절반이 빈곤층인 니카라과를 먹여 살릴 유일한 방법은 대운하밖에 없다고 말한다. 중미 최대의 니카라과 담수호가 오염될 가능성 때문에 환경 재앙을 우려하는 소리도 높다. 특히 이웃인 코스타리카는 자국 생태계가 받을 영향을 대단히 걱정하고 있다.

한편으로 주권 회복, 다른 한편으로 빈곤문제 해결의 상징인 두 운하, 그러나 보다시피 문제가 적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과 장소에 따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라 형태를 달리하면서도 보편적으로 발현되는 억압권력의 실체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억압권력은 때론 주권 침해로, 때론 불평등으로, 때론 약자 탄압으로, 때론 환경 파괴로 나타난다. 이 모두에 맞서면서도 새로운 형태의 억압권력이 출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한 단계의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단계의 문제가 어느새 우리 곁에 와 있기 때문이다. 모순적인 인권의 교훈, 두 운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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