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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타인을 위한 빈칸 / 임자헌

등록 2014-11-23 18:46

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지난 13일은 전태일 열사의 44주기였다. 바로 그날 대법원은 쌍용차 해고무효 소송을 파기 환송했다. 즉 정리해고가 적법하다고 회사 쪽 손을 들어준 것이다. 노동자도 사람이라는 것을,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을 전태일 열사가 온몸을 불살라 외치다 스러진 날 대법원은 보란 듯이 노동자에게 절망을 선언했다. 2009년부터 시작된 쌍용차 노동자들의 ‘해고무효 확인소송’은 만 6년을 앞두고 결국 비극의 마침표를 찍었다. 대기업들은 이제 경영상의 이유를 들먹이며 얼마나 더 신나게 정리해고의 칼날을 휘두르게 될까? 문득 판사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판결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같은 날,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다. 해마다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하는 시험이기는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여년이나 되다 보니 내게는 이제 별다른 감흥 없는 일이 되었는데, 쌍용차 해고무효 확인소송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을 보는 순간 다시 이 시험에 시선이 갔다. 학생들의 6년이 새삼 궁금해졌다. 스스로의 삶을 살아낼 준비를 하는 중·고등학교 6년간 그들은 무엇을 배우고 생각했으며, 또 무슨 마음으로 이 시험을 보고 있었던 것일까? 이들의 6년, 그리고 이 시험을 대하는 이들의 자세가 우리의 내일을 결정한다. 이러한 판결이 나오게 된 원인도, 이러한 판결이 이 나라에서 다시 반복될지의 여부도 그 첫 단추는 결국 교육에 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법은 누가 풀어도 똑같은 답이 나오는 수학공식이 아니다. 법을 다루는 사람의 마음에서 결과가 나온다. <일성록>과 <심리록>을 보면, 정조 임금이 살인사건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여 판결했는지를 알 수 있다. 고작 이름이 ‘박강아지’ 정도로 기록된, 어느 마을 주막 밥 나르는 아이가 걷어채어 죽은 사건에 대해서도 정조는 몇 번이고 실정을 제대로 알아내라고 지시한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제대로 된 이름도 없이 ‘강아지’로 불리던 아이를 임금인 그가 쉽게 지나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어떤 판결도 ‘이건 누가 해도 이럴 수밖에 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없다. 마음에 담긴 것이 의지를 결정하고 의지가 지구력과 집요함, 심지어 지혜까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초·중·고등학교를 거치며 아이들은 마음에 무엇을 담고 살아야 할지를 배운다. 삶의 방향이 대개 결정되는 것이다.

선인들은 <소학>을 마치고 나면 <대학>을 통해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주희가 쓴 ‘대학을 읽는 방법’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이제 우선 이 <대학>을 익숙해질 때까지 읽어서 빈칸을 만들고, 다른 책으로 그 빈칸을 메워 가도록 하라.” 공부는 회색빛 암기가 아니다. 진짜 공부의 시작은 ‘빈칸’을 만드는 데서 시작된다. 학교에 가는 것은 내 생각을 지우고 가르쳐주는 대로 달달 외우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빈칸을 만들고 그 많은 빈칸에 답을 찾아 넣는 법을 배우기 위해 가는 것이다. 공부의 빈칸도 내 삶의 빈칸도 만들지 못했는데 타인을 위한 빈칸이 만들어질 리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내 마음에 타인을 위한 빈칸이 없어도 수많은 시험들만 통과하면 다른 사람의 인생을 판단하고 좌지우지할 힘을 준다. 수능과 출세를 위한 그 숱한 시험들은 빈칸이 사치라고 말한다. 하지만 ‘너’가 살 수 없는 세상은 ‘나’도 살 수 없는 세상. 타인이 허물어지는 세상이라면 나도 곧 허물어질 것이란 진실은 바로 이 빈칸이 가르쳐줄 것이다.

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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