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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갑질의 연쇄 / 조원광

등록 2014-12-28 18:56

조원광 수유너머N 회원
조원광 수유너머N 회원
택시를 타자, 기사님이 대뜸 땅콩 회항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조현아 전 부사장에 대해 물었다. 대답을 할 새도 없이 그에 대한 규탄을 늘어놓으신다. 맞장구를 치다 보니 시간이 훌쩍 갔다. 요즘 조현아씨에 대한 질타가 넘쳐난다. 그런데 욕을 하고 있는 우리는 이런 ‘갑질’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 전 노트북 고장으로 서비스센터를 방문한 적이 있다. 고장 난 노트북 때문에 발표를 제대로 하지 못한 나는, 고백건대 짜증이 나 있었다. 그래서 수리기사님을 만났을 때 무의식적으로 내가 겪었던 불편을 투덜거렸다. 그러자 기사님은 단 1초의 간격도 없이,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에게서도 본 적 없는 깊은 공감과 안타까움의 표정을 지으시며 사과하셨다.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는 내 개인적 사정인데 말이다. 민망하고 궁금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곧 어렵지 않게 답을 알 수 있었다. 수리를 위해 잠깐 머무는 동안, 내가 봐도 이해하기 힘든 고객들의 요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런 ‘우리 고객님들’을 대하는 일상이 기사님에게 과도한 자동적 친절을 익히게 했을 것이다.

사회학자 리처드 에머슨의 말처럼, 권력은 의존에서 온다. 내가 누군가에게 바라는 바가 있어 의존하면, 그는 내게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나는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그 사람의 여러 요구를, 심지어 부당한 요구까지 들어주려 할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거꾸로 의존의 대상이 되며 살아간다. 누구도 스스로 모든 것을 마련할 수 없기에, 사회는 복잡한 의존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누군가의 눈치를 보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 내가 가진 자원으로 누군가에게 권력을 행사할 위치에 선다. 그래서 나같이 별거 아닌 사람도 상황에 따라 고객 평가 점수 따위의 자원을 쥐게 되어 수리기사님이 알아서 기분을 맞춰주는가 하면, 조현아씨처럼 평생 아쉬운 소리 할 일 없을 것 같은 사람도 사과를 하겠다며 나서게 된다. 계속되는 의존의 연쇄 속에서 우리는 때로는 을이 되고 때로는 (드물지만) 갑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의존의 연쇄를 대하는 태도는, 많은 경우 을로서 받는 스트레스를 갑이 될 때 풀어내는 식인 듯하다. 콜센터 노동자를 비롯한 서비스 직종 종사자들이 유난히 많은 스트레스를 감내하고 있음은 이것의 반증이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다고 내 상처가 사라지지 않기에, 이처럼 서로를 할퀴는 갑질의 연쇄는 백해무익하다. 아주 이기적인 관점에서도, 을에 대한 배려와 이해의 연쇄가 훨씬 바람직하다. 나 역시 곧 을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의존이 사라지지 않는 한 갑을관계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갑을관계라도 넘지 말아야 할 한계와 선을 사회적으로 합의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누구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의존의 연쇄에서 덜 상처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적 합의를 앞서서 만들어가야 할 정치인, 그것도 여당 대표가, 누구보다 무수한 갑질을 감내하고 있을 청년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에게, “나쁜 사람을 구분하는 능력”을 가지라고, “부당한 대우를 당했을 때 상대를 기분 나쁘지 않게 설득”하라고 조언했다 한다. 부당한 갑질을 제어할 아이디어를 내는 대신 을에게 더욱 힘을 내 갑을 파악하고 이해하라 격려(?)하는 모습에서, 오랫동안 을에서 멀어진 덕에 생기는 고위층 특유의 무감함을 목격하는 것 같아 참으로 화가 나고, 또 무섭다.

조원광 수유너머N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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