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을 보다가 아주 묘한 대사를 듣게 되었다. 대기업 인턴이었으나 채용에 실패하고 다른 작은 기업에 취직하게 된 상현이, 검정고시 출신으로 여러 대졸 인턴을 제치고 사원이 된(이력 때문에 계약직으로) 장그래에 대해 평하는 대사였다. “장그래가 ‘우리’라고 생각해요? 아니죠. 우리가 걔랑 어떻게 공평한 기회를 나눠요? 울 엄마가 나 학원 보내고 과외 붙이느라 쓴 돈이 얼만데! 이건 역차별이라고요. 나도 좀 놀걸. 중고등학교 내내 밤 12시 안에 자 본 적이 없다고요. 초딩 때요? 학원만 몇 개를 돌았게요! 대학 때는 어학연수. 근데 이게 뭐야? … 그거 알아요? 우리가 우리로 계속 남으려면 대기업에 가야 해요.”
이게 다 무슨 말인가? 다 가졌으니 더 가져야 옳다는 말인가? 학원과 과외 뺑뺑이 돌 형편이 안 되는 학생들은 사회에서 계속 낮은 자리에 있어야 공평하단 말인가? 경기침체와 낮은 취업률은 우리 사회를 어디까지 병들게 한 것인가?
이런 문제를 다루고 있는 <우리는 차별을 찬성합니다>란 책을 찾아 읽어보았다. 지은이는 책에서, 경쟁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성장해온 오늘의 20대들이 최악의 취업률 속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하게 되자 문제 해결 방법으로 더욱더 혹독한 자기계발과 타인 배제의 논리를 선택했고, 그 각박함에 대한 위로는 ‘힐링’에서 찾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들은 왜 이런 사회가 되었는지 구조적인 문제를 짚어보지도 않고 사회에 해결책을 요구하지도 않는데, 이는 나 하나가 사회를 흔들 수 없다는 사고에 어려서부터 아주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일까? 대법원이 쌍용자동차 정리해고가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려 노동자들을 절벽으로 몰아도, 그래서 노동자들이 오체투지를 하고 공장 안 굴뚝에 올라가 부당함을 외쳐도, 앞으로는 정규직도 좀더 쉽게 해고하겠다는 정책을 내도 대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들려오지 않는다. 저자는 말했다. 너희들의 시각에 문제가 있다고, 사회에 문제가 있다고 일깨워주면 20대들은 되묻는다고, “그래서 대안이 뭔데요? 대안이 있어요?”
대안을 물어 질문을 차단하는 모습을 보며 우린 객관식의 저주에 걸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객관식에는 반드시 ‘정답’이 있다. 객관식으로만 성장한 우리는 ‘정답’의 노예가 된 채 학교를 졸업한다. ‘꼭 이렇게 봐야 하나? 저쪽에서 보면 다르게도 볼 수 있지 않나? 네 생각은 어때?’ 그런 다면적인 해석과 질문은 성적을 올리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든 소설이든 예술이든 철학이든 과학이든 사회든 정치든, 인간과 세상의 어떤 측면을 배우든지 반드시 오지선다 중 정답이 있고, 100점이라는 완벽한 성취가 가능한 게 학교교육이다.
객관식에 다양성은 불필요하다. 서로의 지혜로 함께 답을 찾을 필요도 없다. 혼자서 100점 맞을 수 있다. 오히려 ‘함께’는 경쟁에서 짐만 될 뿐이다. ‘우리’란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편한 것, 너를 배제하는 편이 훨씬 이롭다. 고민할 시간에 정답지를 외는 게 더 효율적인 것이 객관식이고, 그래서 삶이나 사회의 문제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도 그 대안에 대해 정답부터 묻는다. 그러나 ‘객관식의 저주’가 객관식으로 풀릴 리 만무하다. 정답은 없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찾아가는 ‘최선의 답’은 있다. 고민의 시작이 대안의 시작이다. 해결책이 없는 것 같아 답답해도 질문을 멈추지 않을 때, 저주는 풀리고 최선의 답이 우리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일 것이다.
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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