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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권력과 레임덕 / 고명섭

등록 2015-02-12 18:41

고명섭 논설위원
고명섭 논설위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는 ‘황야의 마녀’라고 불리는 무서운 여자 마법사가 나온다. 이 마법사가 처음 등장할 때 화면은 그 섬뜩한 카리스마로 공포스러운 분위기마저 띤다. 마법사의 붉은 입술은 우아하고 냉혹하며, 커다란 몸집은 세상을 휩쓸어버릴 듯 위압적이다. 자유자재로 변형하며 어디서나 출몰하는 고무인간들은 마법사의 뜻을 그대로 따르는 수족의 연장이다. 이 마법사가 주인공 소피를 훑고 지나가자 파릇파릇한 젊음이 한순간에 증발해버린다. 열여덟살 소녀는 영문도 모른 채 허리도 펴지 못하는 아흔살 노파가 되고 만다. 마법사의 마력은 청춘의 생기를 빼앗기도 하지만, 그 자신의 생명력과 젊음을 지탱하는 힘이기도 하다. 마법의 힘으로 풍만하고 팽팽한 젊음을 누리던 이 마법사는 마력을 잃어가면서 살집이 축축 늘어진 무력한 할머니로 주저앉는다. 이 영화에서 마법은 권력을 암시하는 듯하다. 마법을 잃은 마법사의 몰골은 권력을 잃은 권력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이 장면을 염두에 둔 듯 <권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권력은 권력자에게 더 넓은 자아의 공간을 마련해준다. 이러한 권력의 논리는 권력의 상실이 어째서 절대적인 공간의 상실로 체험되는가를 설명해준다. 세계 전체를 꽉 채우고 있던 권력자의 몸이 보잘것없는 한 조각 육체로 줄어든다.” 권력이 미치는 곳 전체가 권력자의 몸이다. 자아는 한없이 부풀어 올라 세상을 덮는다. 내 힘이 닿는 곳까지가 ‘나’이다. 내 소유물인 이 세상에서 내 뜻을 거스르는 것은 뿌리 뽑혀야 하고 사라져야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권력이 모래알처럼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면, 터질 듯 팽창했던 자아가 바람을 잃은 풍선처럼 급속히 수축된다. 권력은 육체의 크기로 줄어든다. 아니, 권력을 잃으면 육체 자체가 쪼그라든다. 힘을 잃어버린 권력의 육체를 가리키는 다른 말이 ‘레임덕’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속의 마법사는 권력의 레임덕 현상을 ‘육체적으로’ 보여준다.

권력의 육체, 권력의 자아를 키워주는 내적인 원동력을 철학자 니체는 권력의지라고 부른다. 권력의지가 원하는 것은 힘의 증강이고 자아의 팽창이며 육체의 확장이다. 지배하고 군림하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그것이 권력의지가 원하는 것이다. 권력의지의 그런 본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동물세계다. 독수리는 어린양을 낚아채고 사냥개는 연약한 사슴의 목을 물어뜯는다. 권력의지는 정글의 법칙을 실행한다. 그러나 이 동물적 권력의지가 니체가 말하려는 것의 전부는 아니다. 우리의 동물적 충동이 승화할 때 예술이 되고 문화가 되듯이, 원초적 권력의지가 승화하면 질적인 변화를 겪는다. 그럴 때 권력의지는 단순히 권력 자체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의 창조를 추구하게 된다. 창조의지야말로 권력의지의 진정으로 인간적인 모습이다. 원시적 권력의지는 세상을 정복하고 제압하려 하지만, 더 높은 권력의지, 곧 창조의지는 세상을 더 아름답고 인간다운 곳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 높이에 이르지 못할 때 권력의지는 원한감정에 사로잡혀 다른 의지들을 끌어내리고 제거하는 데 몰두한다. 그 끝에 있는 것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낸, 무력한 육체에 갇힌 마법사다.

권력의지는 영원할 수 없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끝내 흩어진다. 권력 자체를 탐하는 권력은 마지막엔 허물과 껍데기 말고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반대로 창조하는 권력이라면, 그 권력으로 만들어낸 더 좋은 세상을 뒤에 남길 것이다. 자신이 창조한 것들을 배경으로 삼은 권력의 퇴장은 아름답고, 힘을 잃고 한없이 쭈그러든 육체의 퇴장은 쓸쓸하다. 이 나라 대통령은 지금 어느 길을 가고 있는가.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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