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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민족’ 이후의 민족?

등록 2015-03-17 18:51수정 2015-03-17 18:51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민족’ 이후의 민족은 코리안들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을 의미할 것이다. ‘민족’은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다. 하지만 그 구성물에서 여러 피차별 소수자들과의 연대와 한반도의 탈군사화를 추구할 만한 여지가 있다면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민족’ 이후의 민족의 새로운, 탈혈연적인 의미는 ‘국가’의 틀에서만 불가능한 한반도 모든 생명들의 평화권·행복권이 아닐까? 민족 담론의 유산에서 긍정성을 찾자면, 병영국가 남북한의 경계선을 넘어 한반도의 평화, 세계 제국들로부터 독립적인 한반도인들의 정체성일 것이다

나의 전공은 사상사다. 그중에서도 최근 주로 공부해온 것은 민족주의 관련의 사상적 흐름이다. 그런 공부를 해온 차원에서는, 최근 한 가지 변화를 감지하게 됐다. 1990년대 말까지는 한국에서는 ‘민족’에 대한 거리 두기는 좌파의 일각에서만 가능해왔다. 식민지 시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개는 민족혁명을 사회주의혁명의 필연적 전 단계로 설정하면서도 민족을 혈연공동체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시대의 구성물로 생각했으며 민족주의의 위험성을 경계했다. 반대로 우파는 - 단일민족이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이광수처럼 - ‘우리 민족’을 신비화시키거나, 일제와 타협할 경우 일본 민족주의의 자장에 편입되곤 했다. 그들에게는, 좌파의 ‘계급’을 상쇄시킬 도구라고는, ‘민족’밖에 없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한데 1990년대 말 이후에 점차 본격화된 뉴라이트 계통의 새로운 우파적 사고가 ‘탈민족’을 외친 뒤로는, ‘민족’은 점차 한국의 우파적 주류들의 언사에서 그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햇볕정책 시기에는 ‘통일’과 관련하여 꽤나 거론되긴 했지만, 특히 이명박 정권에 의해 햇볕정책이 폐기된 이후로는 ‘민족’의 자리를 ‘국민/국가’, 그리고 무엇보다는 ‘국가경쟁력’이 차지해 버리고, 좌파민족주의야말로 강경보수 정권의 ‘공적 1호’가 됐다. 급기야 계급 좌파의 일각에서 사용되던 ‘종북’ 같은 지칭어가 우파적 주류에 의해 전유돼 좌파민족주의자들을 마녀사냥하는 도구가 되고, ‘종북’으로 몰린 통합진보당은 강제 해산을 당하고 말았다. 이와 동시에 제도권 담론은 빠르게 민족주의에서 대한민국주의로, 즉 국기 게양과 ‘국부’ 이승만·박정희 숭배, ‘국군’에 대한 긍지 등으로 이동하고 말았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즐겨 쓰던 ‘민족’을, 왜 그 숭배자들이 이제 기피하는가? 좌파 일각의 민족 상대화는 계급의식에 대한 강조의 결과였다면 우파의 ‘탈민족’은 크게 봐서 한국 자본의 이해관계에 맞추어져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즉 세계체제 핵심부의 자본이 한국의 은행권과 주식시장에서 주도적 영향을 미치는 반면 한국이 캄보디아나 방글라데시의 섬유공업 분야에서 가장 큰 투자국이 되는 시대에는 자본의 국제적 이동에 약간이라도 방해가 될 수 있는 ‘민족’과 같은 개념들은 척결 대상이다. 어릴 때부터 미국 등 핵심부 사회에서 성장해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자연스러운 신자유주의 대한민국 차세대 엘리트의 일상도, 저임금 노동력 보충과 인구 정책의 이름으로 노동·결혼 이주가 활성화된 현실도 ‘민족’과 맞지 않기에 ‘민족’이 폐기 대상에 올랐다. 거기에다가 ‘민족’ 애호의 중요한 배경에는 한국 지배층의 북한 영토에 대한 주권 주장 등이 있었는데, 이 주장은 예전과 같은 강도를 나타내지 않는 듯하다. 북한이 붕괴돼 한국 지배자들이 은근히 원하는 ‘인수인계’ 식의 통일이 될 가능성도 줄어든데다가 남북경협보다 동남아시아 등에 대한 ‘경제식민화’가 더 좋은 이윤을 낸다는 일종의 판단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우파도 적어도 부분적으로 ‘탈민족’을 향해 가지만, 좌파도 좌파대로 ‘민족’ 의제에 대한 관심을 상실했다. 일단 외국계 인구가 전체 인구의 거의 3%에 육박하는 상황에서는 ‘민족’ 이야기가 배제의 서사로 들릴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가 ‘민족’과 깊이 연결돼 있는 ‘통일’ 의제에 대한 회의가 가미된다. 일면으로 보수화된 분위기 속에서 ‘미군 철수’와 ‘불평등 조약 폐기’, ‘자주적 통일’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현실정치를 하려는 좌파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부담이다. 또 일면으로는, 통일의 상대가 될 북한의 모습에서는 어떤 미래지향적인 부분들을 발견하기가 힘들어졌다. 1980년대 말까지 북한을 비록 왜곡되긴 해도 일단 ‘현실 사회주의 국가’로 종종 보곤 했지만, 오늘날 가시화된 북한의 모습은 자본주의를 향해 이동하는 동북아의 하나의 낙후된 경제·사회다. 그런 상황에서는, 민심을 읽고 전략을 짜야 하는 좌파로서는 ‘민족’도 ‘통일’도 호소력이 약한 구태의연한 구호로 다가온다.

물론 ‘민족’에 대한 좌파의 회의에는 짙은 현실성이 있다. ‘민족’을 오랫동안 보수적 제도권이 대민 동원용으로, 정권 명분 부여용으로 이용해 먹은 경력도 있는데다가, 한국의 대자본들이 아시아나 동유럽에서는 물론, 서구나 미국에서도 ‘고용주’로 군림하는 자본 국제화 시대에 ‘우리 민족’과 ‘피착취 대중’을 단순하게 동일시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북한 통일의 과정에서는 ‘민족’의 명분만이 단순하게 앞장서는 것도 곤란하다. 세계 자본주의적 서열 속에서 남한과 북한의 위치가 각각 현실적으로 대조적이 된 이상, ‘민족’을 앞세운 조급한 통합은 실제로 북한 주민들에게 재앙이 될 수도 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서 겪는 가난과 불안노동, 차별의 모습을 보면 그 재앙이란 어떤 것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학계에서 ‘인종’이라는 용어를 점차 폐지했듯이 우리가 여태까지 써온 ‘민족’의 개념도 그저 폐기처분해야 할 것인가? 아마도 ‘혈연공동체’라는 뜻이라면, 더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다. 전체 결혼 건수 중에서 국제결혼이 10~12%에 이르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혈연적 ‘민족’은 차별적 언사에 불과하다. 언어공동체로서의 민족도 분명히 재고돼야 한다. 외래어투성이의 남한 말 때문에 새터 생활에 적응이 어렵다고 탈북자들이 늘 불평할 정도로, 남북한의 언어는 더이상 동일하지 않다. 아무리 ‘민족 언어의 동질성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 해도, 반세기 이상 취해온 상이한 언어정책의 효과를 상쇄하기에 역부족이다. 대부분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일상언어는 러시아어이며, 재일조선인 성인들의 59% 정도가 일상어로서 일본어를 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연변 말투’를 한국에서 쓰는 경우 차별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즉 ‘단일한 민족어’는 신화에 불과하다. 마찬가지로 ‘민족’은 정치의식의 단일성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한국인의 대부분은 오늘과 같은 매우 불평등한 한-미 관계를 당연시하지만, 대다수의 북한인과 대부분의 조선족이나 고려인, 그리고 상당수의 재일조선인들에게는 미국의 군사적 보호령으로서의 남한의 위치는 전혀 긍정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종래의 ‘민족’이 상대화되는 상황에서의 ‘코리안’의 실체는 무엇인가? 결국 지리·역사, 이를 배경으로 하는 개인적 정체성의 선택이라고 본다. 아무리 ‘민족’을 상대화하고 통일 지상주의를 극복해도, 남북한이 분단돼 있어 각자가 서로 잠재적 적이 되는 국제 동맹 관계에 속하는 이상, 한반도 전체가 늘 긴장상태에 처해 있을 것이다. ‘민족’의 신화를 넘어도, 특히 요즘처럼 미 제국과 세계체제 준주변부의 제국인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에서 긴장이 첨예화되는 상황에서는 한반도에서의 두 국가의 중립화 통일로의 움직임들이 절실히 요구된다. 세계의 군사적인 중심들로부터의 거리 두기라는 의미에서의 중립화, 그리고 한반도 탈군사화를 의미하는 통일로의 여정이 아니라면, 한반도는 평화롭고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민족’ 이후의 민족의 새로운, 탈혈연적인 의미는 ‘국가’의 틀에서만 불가능한 한반도 모든 생명들의 평화권·행복권이 아닐까? 민족 담론의 유산에서 긍정성을 찾자면, 병영국가 남북한의 경계선을 넘어 한반도의 평화, 세계 제국들로부터 독립적인 한반도인들의 정체성일 것이다. 이는 계속 살려야 하는 유산이 아닐까?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이런 차원에서 ‘민족’ 이후의 민족은 코리안들의 다양성에 대한 인정을 의미할 것이다. 민족어는 복수다. 평양의 문화어도, 일어가 섞인 재일조선인들의 조선어도, 고려말도 동등한 민족어로서의 지위를 얻어야 한다. 동시에 자본주의적 현실 속에서 북한인과 조선족, 고려인 등의 수많은 저임금 지대의 코리안들이 광의의 피착취 대중에 속하게 된다는 점에 대한 고려도, 코리안들을 포함한 한반도 안팎의 피착취·피차별 집단들에 대한 연대도, 이와 같은 개념에 포함돼야 할 것이다. ‘민족’은 사회적 구성물일 뿐이다. 하지만 그 구성물에서 각종 피차별 소수자들과의 연대와 한반도의 탈군사화를 추구할 만한 여지가 있다면 이를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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