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라는 책에서 자녀 양육과 관련된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자녀를 낳아 기른 많은 부부들은, 결혼 생활에서 자녀가 커다란 행복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래서 자녀들에게도 자식을 낳기를 권한다. 하지만 아이를 둔 사람들의 만족도를 실제로 측정해 보면, 많은 경우 그 결과는 이런 회고와 거리가 멀다. 부부는 보통 결혼 초에는 행복하지만, 자녀를 낳아 기르며 만족도가 떨어진다. 그리고 자녀가 독립할 때 즈음 다시 만족도를 회복한다. 문화권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아이를 키운 경험을 회고할 때 느끼는 정서는 실제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정서와 적잖이 다른 듯하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일차적으로 그것은 기억의 속성 때문이다. 여러 뇌 과학자가 지적하듯, 기억은 사진처럼 정확하지 않다. 과거를 떠올리는 일은 단편적인 정보들에 근거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가깝다. 그리고 이 재구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정보는, 가장 인상적이었거나 가장 최근에 경험한 일이다. 군대에서 유격 조교가 아무리 악마같이 굴어도, 이따금씩 잘해주면(주로 마지막에 그런다) 그 기억이 너무나 인상적이라 조교에 대한 기억이 전체적으로 따뜻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자녀에 대한 기억이 실제보다 미화되는 것도 비슷한 일이다. 자녀로 인해 크게 기뻤던 인상적인 경험은, 예를 들어 처음 엄마, 아빠라고 불렸던 감동적인 기억은 전체 기억을 채색한다. 그런데 어떤 기억이 인상적인 까닭은 그것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이 드물고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상적인 기억에 좌우되는 우리의 회상은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나는 젊음에 대한 찬양 역시 이런 부정확한 기억의 일종이라 생각한다. 젊음은, 더 이상 젊지 않은 사람들의 회고 속에서만 아름답다. 정작 젊은이들은 자기 삶을 긍정적으로 보기 힘들다.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이용당하기 일쑤인데, 어떻게 그 처지를 아름답게 본단 말인가. 하지만 사회는 젊은이들이 삶을 긍정적으로 여기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적어도 그래야 한다고 믿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숱한 좌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사회의 톱니바퀴 노릇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의 편집 능력은 이에 능숙하게 부응한다. 기성세대 역시 젊은 시절 여러 고통을 겪었음에도, 간혹 있었던 영광의 순간을 중심으로 젊음을 기억하는 것은, 끔찍했던 고생조차 값진 인생의 수업이라 회고하는 것은,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약하다’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아름다운 회고 덕분에, 지금까지도 반복되고 있는 젊음을 힘들게 하는 여러 객관적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사회의 양육 보조는 턱없이 부족하고, 열정 페이라는 노골적 착취가 횡행한다. 나아진 것은 그 착취와 고통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회고의 노하우뿐이다.
회고는 실시간의 경험보다 부정확하다. 회고를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 사회적 필요가 있을 경우 더욱 그러하다. 아름답지만 부정확한 회고가 개인의 차원에서 각자의 삶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위로하는 수단이 될지는 몰라도, 사회의 차원에서는 현실적 문제에서 눈을 돌리게 만든다. 지나고 보니 아름답더라고, 지금은 힘들어도 나중에는 즐거울 거라 말하는 게 아니라, 예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을 힘들게 하는 조건들을 바꿔야 한다. 우리 인생은 회고 속에서가 아니라 실시간으로 행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조원광 수유너머N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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