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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기·승·전·중동’의 허무함 / 최우성

등록 2015-03-24 18:49수정 2015-03-25 15:28

박근혜 대통령이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중동 4개국 순방을 위해 지난 3월 1일 오후 서울공항을 통해 전용기편으로 출국하며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박근혜 대통령이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카타르 등 중동 4개국 순방을 위해 지난 3월 1일 오후 서울공항을 통해 전용기편으로 출국하며 인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콘텐츠는 없는데 진지하다.’

한동안 ‘정치인’ 박근혜의 인물평은 대체로 이랬다. 당당히 여당 후보로 나선 지난 대통령 선거에선 달랐다. 그는 진지함뿐 아니라 콘텐츠도 꽤 보강된 후보로 여겨졌다. 여당 프리미엄에다 보수세력의 경륜이 보태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겠으나, 적어도 대선 후보 공약집만 놓고 봤을 때 문재인 후보 쪽 작품보다 내용도 훨씬 풍부하고, 무엇보다 짜임새가 있었다. 정책은 결국 패키지(묶음)인 법. 어쨌거나 박근혜 후보의 콘텐츠는 유권자들에게 먹혀들었다.

그로부터 2년이 흘렀다.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평가는 새로 내려질 것 같다. ‘콘텐츠도 약한데 분주하다.’ 그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박 대통령으로선 마음 같지 않은 경제상황을 제일 먼저 꼽고 싶을 게다. 대내외 여건이 녹록지 않은 건 분명 맞다. 그럼에도 정책의 성패가 올바른 패키징에 달려 있는 건, 우선순위를 조율하고 이해충돌을 조정하는 것 못지않게, 상황 변화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황은 상수가 아니다. 국정 최고책임자에게 플랜 비(B)는 사실상 숙명인 셈이다. 중요한 건, 훈련 상황(플랜 에이)과 실제 상황(플랜 비)을 관통하는 일관된 방향성과 탄탄한 논리구성이다. 콘텐츠의 힘, 결국 정책효과는 여기서 판가름난다.

최근 박 대통령이 선보인 이른바 ‘중동 개그’는 그가 지닌 콘텐츠의 민낯을 보여준 상징적 사례다. “중동 국가들이 포스트오일 시대에 대비해 사업 다각화를 추진하고 있다. 하늘의 메시지다. 대한민국 청년이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라. 다 중동 갔다고.” 청년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누리꾼들은 중동 경제를 지탱하는 국제유가가 현재 바닥을 기고 있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즉각 ‘썰렁 개그’라고 일축하고 나섰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박 대통령의 얘기에서 썰렁함보다는 허무함이 더 진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놀랐다. 대통령의 인식이 실제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앞뒤가 서로 어긋나는 논리의 빈약함을 너무도 태연하게 드러내고 있어서다. 국제유가가 반 토막 났다는 이유만으로 곧장 대통령의 얘기를 반박할 건 아니다. 중동 국가들은 과거 고유가 시대를 지나는 동안 미래를 위해 충분한 재원을 비축해두었기 때문에 사업 다각화 등 투자 여력이 큰 편이다. 이런 겉모습을 두고 ‘제2의 중동 붐’으로 해석하는 박 대통령의 판단은, 다소 과장됐을지언정 완전히 엉터리라고만 몰아붙일 일은 못 된다. 놀라운 건 이른바 제2의 중동 붐을 우리 청년들의 일자리 문제와 곧장 연결짓는 그 단순함과 용기다. 중동에 개발 바람이 부는 건 분명하나, 개발 방식은 과거와 질적으로 다르다. 단순히 발주를 받아 인프라 시설을 지어주는 데 방점을 찍는 게 아니라 금융과 아이티(IT) 등을 망라해 사업개발 자체를 떠안는 구조로 바뀌는 중이다. 단순시공사업이라기보다는 종합시행사업에 가깝다. 거칠게 말해, 더 많은 부가가치를 얻지만 더 적은 인력만 필요로 하는 건 물론이다. 더군다나 중동 국가들은 우리보다 베이비붐이 한 세대 정도 늦어서 이제야 청년 인구 폭증 시기를 맞고 있다. 이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게 중동 국가들의 시급한 과제다. 대한민국이 텅텅 빌 정도로 우리나라 청년들이 그곳에서 꿰찰 일자리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머릿속을 빼고는.

최우성 논설위원
최우성 논설위원
박 대통령의 임기는 얼추 1000일 남짓 남았다. 초조할 수도 조바심 날 수도 있다. 한때 장점이었던 진지함만이라도 잃지 않는다면 모자라는 콘텐츠를 차분히 채워갈 시간은 충분하다. 만일 둘 다 없다면 대통령 개인에게도 우리 사회에도 더없이 불행한 1000일이다.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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