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머의 본질은 자기 파괴라고 한다. 사람들은 대개 남이 나보다 낫지 않을까, 나를 해치지 않을까 걱정하고 상대방을 경계한다. 그런데 상대방이 자신을 낮추고 나서면 ‘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군’ 하면서 안심하고 통쾌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코미디언이 바보 연기를 한다고 비틀거리다가 꽈당 넘어질 때 관객이 폭소를 터뜨리는 것도 맥락은 같다. 유머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데 이런 심리 기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좋은 유머를 구사하기는 쉽지 않다. 자신을 낮춰서 무시당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자신이 높아지도록 고급 전략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쓰이는 전략은 단점을 고백하거나 실책을 인정하되, 이미 극복하고 관리할 수 있는 문제를 택하는 것이다. 유머는 인생에 대한 자신감과 여유에서 비롯한다. 유머는 실력이고 인격이다. 외국에선 유머를 리더십의 중요한 요소로 꼽는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유머 달인이었다. 링컨이 어느 날 반대당 의원으로부터 인신공격을 당했다. “당신은 말만 그럴듯하게 하는, 두 얼굴을 가진 이중인격자입니다.” 링컨은 대수롭지 않게 맞받았다. “그래요? 내가 정말 두 얼굴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왜 하필 이렇게 못생긴 얼굴을 달고 다니겠소?” 링컨은 못생겼지만 스스럼없이 용모의 약점을 거론했다. 용모 따위는 진작에 극복했다는 자신감과 여유가 느껴진다.
링컨의 부인 메리 토드는 충동적이고 성급하며 신경질이 많은 편이었다. 링컨이 변호사로 일하던 시절 어느 날 아내가 생선가게 주인에게 짜증 섞인 말을 퍼부었다. 불쾌해진 생선가게 주인이 링컨에게 대신 항의했다. 링컨은 웃으면서 가게 주인한테 조용히 부탁했다. “나는 15년 동안 참고 살아왔습니다. 주인 양반은 15분 동안이니 그냥 좀 참아주십시오.”
며칠 전 이정현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쓰레기 발언’을 해서 논란이 일고 있다. “광주시민들이 이정현이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저는 쓰레기다. 박근혜 대통령이 나 같은 쓰레기를 (쓰레기통에서) 끄집어내서 탈탈 털어가지고 청와대 정무수석을 시키고, 홍보수석을 시키고 이렇게 배려를 했다.” 그는 17대·19대 총선에서 광주 서구을에 출마해 낙선했으며,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으로 근무하고 나와 지난해 7·30 재보선 때 전남 순천·곡성으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됐다.
자신을 쓰레기라고 하다니, 낮춰도 너무 낮췄다. 그 결과 자신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상한 사람으로 만드는 언어효과를 초래했다. 광주시민들은 아마 정치노선이 다르고 실력도 그저 그렇다고 생각해 그에게 표를 덜 주었을 것이다. 이 최고위원이야 서운하겠지만, 광주시민들의 선택이 투표 의사결정의 일반 행태와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하면, 광주시민들은 특정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이정현 후보의 인격을 송두리째 무시해버린 극단적인 사람들로 비난받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말도 그렇다. 쓰레기를 주워 썼다고 하면 대통령은 뭐가 되나? 쓰레기통이나 뒤지고 다니는 사람이란 말인가? 이 최고위원에게 링컨 수준의 유머감각을 기대하진 않지만, 쓰레기 발언은 ‘썰렁 유머’치고도 좀 심했다.
얼마 전 유엔이 국제 행복의 날을 맞아 세계 143개국을 상대로 실시한 ‘국민 행복감’ 조사 결과 한국이 118위로 세계 최저 수준에 머물렀다. 중국, 일본에 뒤지고 중동 팔레스타인, 아프리카 가봉과 순위가 같았다. 조사를 맡은 갤럽의 설문지에는 평소 웃고 사는지를 묻는 항목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여유가 없고 늘 긴장하면서 무표정하게 사는 것을 국제적으로 들킨 느낌이다. 그렇게 살지 말자. 행복감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많은 사람이 유머를 잘 이해하면 좋겠다.
박창식 논설위원 cspcsp@hani.co.kr
박창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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