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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재가 / 이재성

등록 2015-04-06 18:42

타히티의 자살률이 유난히 높은 이유를 추적하던 인류학자 밥 레비는 타히티에 ‘비통’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타히티 사람들은 비통한 감정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몰랐고, 괴로워하다 자살하는 경우가 많았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으로 유명한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이를 ‘저(低)인지’의 대표적인 사례로 소개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감시국가의 공식 언어인 신어(新語)는 해마다 어휘가 줄어드는 게 특징이다. 예를 들어, ‘자유’라는 말을 없애면 사상범죄의 가능성을 그만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단어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다. 언어는 의식의 반영이지만 거꾸로 의식을 규정하기도 한다는 걸 ‘빅브러더’는 잘 알고 있다.

언어는 퇴행하기도 한다.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중세영어 ‘queynte’가 거리낌없이 등장하는 걸 보면 당시의 성 관념이 지금보다 훨씬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세계사를 품은 영어 이야기>의 지은이 필립 구든은 “방귀(fart)와 소변(piss)처럼 표준 영어와 금기어 사이의 중간 지대에 있는 단어에 대해 현대인은 선조에 비해 더 내숭을 떠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박근혜 정부 들어 ‘재가’라는 단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박 대통령이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의 임명을 ‘재가’했다는 보도도 나온다. 자기가 ‘내정’해 놓고 자기가 ‘재가’하는 꼴이다. 청와대 발표를 언론이 그대로 받아쓴 탓이다. 재가는 ‘왕이 직접 어새를 찍고 결재하여 허가하던 일’을 뜻한다. 군사독재가 종식된 뒤로는 거의 쓰지 않던 말이다. 민주주의의 퇴행과 함께 언어도 퇴행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사라졌던 ‘각하’라는 호칭을 연거푸 세 번이나 외쳤던 사람의 총리 임명을 ‘재가’한 걸 보면, 박 대통령의 생각을 짐작할 만하다. 레이코프 식으로 말하면, 왕조시대 혹은 독재시대에 대한 ‘과다인지’의 사례가 아닐까.

이재성 문화부 책지성팀장 s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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