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과 관련된 자료를 살피다보면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특히 불평등과 폭력 지표의 관계를 볼 때 그러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을 대상으로, “지난 한 해 동안 폭행을 당하거나 강도를 당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과 불평등 지표인 지니계수의 관계를 보면, 양의 상관관계가 확인된다. 더 충격적인 것은 학생들 사이의 괴롭힘 역시 이와 비슷한 관계를 보인다는 점이다. 최근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고 보고한 학생의 비율 역시 지니계수가 높은 국가일수록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불평등할수록 서로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고 있는 형국이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정치학자인 로트스테인과 어슬래너는 “모두가 모두를 위해”(all for all)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불평등이 공동체 의식과 상호신뢰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지적함으로써, 이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불평등은 사람들이 한 집단에 소속된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을 떨어트린다. 당연히 신뢰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나와 상관없는 삶을 사는 사람을 어떻게 믿겠는가? 상호신뢰가 낮고 공동체 의식이 약화된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은 폭력이 일어나는 것은 안타깝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아가 저자들은, 분리를 자극하는 정책이라면 심지어 그것이 복지 정책이라 해도 상호신뢰를 떨어트릴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이 스웨덴과 미국의 사례를 연구한 바에 따르면, 이른바 선별복지는 상호신뢰를 약화시킨다.
요즘 힘드실 것 같은 한 도지사님을 포함하여, 여러 어른들이 학교가 모든 학생들에게 공평하게 급식을 제공하는 것에 불만이 많은 듯하다. 그 불만이 나쁜 마음에서 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짜 좋아하는 아이로 키울 셈이냐!’라는 말에는, 자칫 학생들이 누군가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 여기는 의존적인 사람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담겨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것처럼 쓸데없는 걱정도 없다. 한국 사회는 그 점에서 아주 확실한 메시지를 학생들에게 지속적으로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스펙 관리를 하지 않으면 취업할 수 없다고, 그 상황은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고용이 되었다 해도 여러 안전장치가 사라질 수 있으니 알아서 자기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노후는 각자 알아서 챙겨야 하며, 자기 몸 자기가 잘 돌보지 않으면 심지어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덕분에 학생들은 믿을 것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확고한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밥 한 끼 함께 먹는다고 이런 절박한 인식이 갑자기 여유롭고 국가 의존적인 인식으로 바뀌겠는가?
걱정해야 할 것은 ‘공짜를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 불평등한 세상에서 원자화되어버린 마음과 거기서 돋아나는 증오와 폭력이다. 공동체 의식은커녕 모두가 경쟁 상대라고 사람들을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증오범죄의 싹이 조금씩 돋아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일베가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혜택을 받는 것 같은 집단을 향해 ‘무임승차자’라 욕을 해대고, 정말 상상하기조차 힘든 방식으로 세월호 유족분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과연 이와 무관할까? 만약 ‘어른’이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가 해야 할 일은 이 각박한 세상에 그래도 우리는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공동체라고 말하는 것이다. 부디 학교에서만이라도 그런 공동체 정신이 실현되기를 바란다.
조원광 수유너머N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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