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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대한민국의 왕 / 임자헌

등록 2015-05-10 18:59

내가 주로 번역하는 분야는 ‘사료’이다. 번역을 처음 시작하고 몇년간은 <일성록>을 번역했고, 지금은 <조선왕조실록> 재번역 사업팀에 소속되어 <정조실록>을 번역하고 있다. 이런 사료를 번역하다 보면 수도 없이 많이 다루는 게 바로 ‘상소’이다. 신문에 칼럼을 쓰게 되었을 때 누군가 내게 말했다. 칼럼이 옛날로 치자면 상소가 아니겠느냐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이 말이 칼럼을 연재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둘은 비슷한 걸까? 다른 걸까?

처음에는 비슷해 보였다. 상소에 실리는 내용 때문이었다. 상소에는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내용, 어떤 정책에 대한 의견, 문제를 일으킨 정책에 대한 개선책, 풍속의 문제점, 다른 신하에 대한 탄핵 등이 실리기 때문이다. 칼럼도 이런 등등의 내용이지 않은가? 그러나 곧이어 둘의 차이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받는 대상에 있었다. 상소는 받을 사람이 분명한 글이다. 바로 ‘왕’이다. 그러나 칼럼은 누구를 향하는 글인가 생각했을 때 조금 모호했다. 일차적으로 이 신문의 독자였지만 독자‘뿐’이지도 않았다. 왜 이런 모호함이 생긴 것일까?

이 문제는 국가의 체제에서 오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선은 ‘왕국’(王國)이었다. 나라의 주인이 왕이었다. 그래서 신하의 글은 오로지 왕을 향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민국’(民國)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은 왕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이 나라의 ‘왕’인 체제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반도에는 내내 왕조국가의 형태만 이어져 왔고, 국민들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민주공화국 체제가 들어선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민주’의 개념이 아직까지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그래서 너와 나 우리 모두가 각각 왕이라는 생각보다 대통령을 왕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쉽게 범하곤 한다. 나 스스로가 책임감을 가지고 이 나라의 모든 것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피지배’에 익숙한 모습이다.

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나는 칼럼을 쓰며 대한민국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가장 많이, 가장 자주 생각했다. 무엇보다 나는 ‘왕’다운가, 이 나라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가 자문했다. 그러자 더 많은 책에 손이 가기 시작했다. 화려한 이력이나 연봉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에 정치도 경제도 교육도 사회도 문화도 다 알아야 했다. 이것은 나의 의무였다. 내가 그것을 스스로 공부하지 않을 때 내 돈을 내며 일을 맡긴 사람들인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이 감히 나를 지배하려 들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나는 나와 함께 이 나라의 왕인 모든 이를 향해, 내 글을 읽어주는 평범한 왕들을 향해 칼럼을 쓰자고 생각했다. 왕답게 살자고, 서로를 보듬자고, 한 명의 영웅을 기다리며 지배받는 것에 익숙해진 채 살지 말고 서로에게 평범한 영웅들이 되어주자고. 조선의 왕은 녹록한 자리가 아니었다. 정말로 많은 공부를 해야 했고, 모르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됐다. 나라를 지켜야 하고 백성을 지켜내야 했기 때문이다. 머리 아프니 나는 모르겠다고 팽개칠 수 없었다. 이 나라의 건강한 내일은 일차적으로 이 나라의 왕인 평범한 우리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진짜 많이 알고 지혜로운 왕이 되어야 괜찮은 고용인을 선발할 것이 아닌가? 우리, 평범하지만 위대한 왕이 되자.

임자헌 한국고전번역원 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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