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우리 안의 ‘연예기획사 사장’ / 최우성

등록 2015-05-19 19:37

몇 년 전 국내 대형 연예기획사 한 곳과 소속 아이돌그룹 사이에 벌어진 분쟁이 큰 화제였다. 대중의 관심을 먹고 사는 스타의 화려한 겉모습에 가려진 불합리한 노예계약 실태가 살짝 얼굴을 내비치기도 했다. 후폭풍도 거셌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손수 나서 연예인들이 기획사와 맺는 전속계약서 세부내용을 가다듬었다. 물론 그 이후에도 연예계 현장에서 크고 작은 분쟁이 모습을 감춘 건 아니다.

어쨌거나 공정위까지 가세해 시장거래 관행을 손질한 결과, 기획사가 연예인을 붙들어 둘 수 있는 전속계약 기간은 예전보다 대체로 줄어들었다. 통상 12년이던 계약기간이 8년으로 바뀐 경우도 있고, 10년에서 7년으로 단축된 사례도 있다. 마치 선수가 특정 구단에서 일정 시즌을 뛰고 나면 새로운 구단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는 프로스포츠의 자유계약선수(FA) 제도와 흡사한 구조다.

전속계약 기간 단축으로 연예인의 선택권이 예전보다 넓어진 측면은 분명 있다. 과연 이뿐일까? 실제로 기획사의 대응방식이 차츰 바뀌었다. 거칠게 말하자면, 연습생 신분으로 기획사 우산 아래 들어오는 예비 아이돌의 스펙이 예전보다도 훨씬 높아졌다고 한다. 대략 이런 이치다. 과거엔 기획사가 예비 아이돌을 4년 교육(훈련)시킨 뒤 직접 활동 기간(4년)과 추가 계약 기간(4년) 동안 수익을 챙겼다 치자. 최초 4년은 기획사 입장에선 초기투자 시기에 해당한다. 춤과 노래, 외국어는 물론이고 심지어 외모까지, 스타가 갖춰야 할 모든 조건을 살뜰하게 챙겨준다.

자, 그런데 전체 계약기간이 8년으로 줄었다 치자. 4년을 초기투자 기간으로 그대로 둔 채 나머지 4년 동안만 투자수익을 거둔다면 전체 수익률은 예전만 못할 가능성이 크다. 기획사로선 여러모로 ‘수지 안 맞는’ 장사다. 초기투자 기간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버리고픈 욕심이 꿈틀거리기 마련이다.

경제학 용어로 옮기자면 ‘자본의 회임기간’이 그만큼 짧아진다는 걸 뜻한다. 자본의 회임기간이란 자본이 초기투자를 거쳐 실제로 이윤을 실현하기까지 걸리는, 자본의 생애주기다. 씨 뿌리고 싹 북돋워 열매 맺기까지 걸리는 기간 말이다. 생애주기가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과거엔 자본(기업)이 감수했던 직원(연습생) 교육·훈련 등 갖가지 비용을 ‘외부화’하기 십상이다. 비용은 남에게 떠넘기되 이윤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엔터테인먼트 산업 현장은 국내 고용시장의 현주소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인지도 모른다. 취업 경험이 전혀 없는 20~30대 청년 실업자 수가 12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30대 취업 무경험 실업자는 지난달 기준으로 9만5천명으로 집계됐다. 청년실업 문제야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쳐도, 그 밑바닥에서 단단하게 굳어지고 있는 흐름은 사뭇 심상치 않다.

시장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이에 따라 기업이 느끼는 이윤 압박이 커질수록, 자본의 회임기간은 점점 더 짧아질 수밖에 없다. 자본의 인내심은 사라지고 ‘불필요한’ 비용부담을 떠안지 않으려는 유인만 커진다. 갈수록 더 많은 기업이 신입보다는 경력직 채용에 매달리는 솔직한 이유이자 생생한 민낯이다. 엔터테인먼트 산업 울타리를 벗어나더라도 ‘연예기획사 사장’은 곳곳에 즐비하다. 아니, 우리 안에 웅크리고 숨어 있다.

 최우성 논설위원
최우성 논설위원
끝은 어딜까? 결국엔 자멸이고 공멸이다. 극단적으로 자본의 회임기간이 아예 사라져버리는 세상, 씨 뿌림과 동시에 열매 맺는 세상은 머릿속에서나 그려봄직한, 자본의 이상향이다. 실상은 기업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꼴이다. 청년세대의 노동시장 진입 원천봉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를 그 문턱을 향해 밀쳐대고 있다.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