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내장탕을 끓였다며 전화를 한 적이 있다. 내 생각 나서 많이 끓였다며 와서 가져가라 했다. 내장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꺼내질 못한 채로 우물쭈물거렸다.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니 무조건 내가 반가워하며 달려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친구의 집으로 가며 골똘히 생각했다. 우리가 함께 내장탕을 먹은 적이 있는지, 내장탕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지, 혹시 다른 친구의 식성과 혼동한 것은 아닌지 등에 대해.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쨌거나 친구의 성의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었다. 집에 가져오자마자 한 번, 다음날에 또 한 번, 그다음 날에 또 한 번, 밀폐용기의 뚜껑을 열었지만, 내장탕 고유의 냄새에 먹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결국 친구의 성의는 냉장고에서 상해버렸다. 개수대 거름망에 걸려 있는 푸짐한 건더기들을 내려다보며 친구에게 몹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야무지게 싸둔 이걸 건네주던, 친구의 뿌듯한 얼굴이 떠올랐다. 내 짧은 식성이 한탄스러웠다. 그때 이후로, 오늘처럼 그 친구가 떠오르는 날엔 내장탕을 사먹으러 가게 됐다. 후추나 다대기를 아무리 넣어보아도 내가 쉽게 먹을 수 있는 맛은 아니다. 몇 숟갈 떠먹지도 못하고 김치에 밥만 먹고 만다. 연습을 하는 마음으로 애를 쓰며, 국물을 몇 숟갈 더 먹고 건더기도 몇 점 더 건져 먹는다. 먹다 만 것에 불과해도 내장탕을 먹고 나면, 친구의 성의를 오래오래 갚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김소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