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분야의 예술가들이 회의실에 모여 있었다. 자기소개부터 시작했다. “저는 연극평론을 하는 아무개입니다”, “저는 공연연출을 하는 아무개입니다”, “저는 음악 하는 아무개입니다”.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사람의 차례였다. 그가 “저는 춤을 추는 아무개입니다”라 말하자마자, 회의실엔 유쾌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일어서서 꾸벅 인사를 했을 뿐인데, ‘춤을 춘다’는 말과 함께 빚어지니 그가 당장 춤을 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만약 그가 “저는 무용하는 아무개입니다”라고 표현했더라면 웃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재미없는 소개시간에, 어감 하나를 이용하여 어색함을 재치있게 지워준 그 사람에게 시선이 갔다. 어쨌든, 평론가와 연출가와 음악가와 무용수와 시인이 만난 그 자리에서, 누구도 스스로를 ‘○○가’라 칭하지 않았던 게 좋았다. 전문직종에 붙여주는 이 접미사는 전문성에 대한 존경이 알게 모르게 내포돼 있다. 그러니 괴짜가 아닌 이상은 스스로에게 그런 표현은 불가능한 것이다. 다른 이들의 마음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시 쓰는 김소연입니다” 하고 내 소개를 한 데에는 작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시인’은 안 하고 시만 쓰며 살겠다고 말해왔다. 내가 꿈꾸던 시인은 아직 멀었다 하는 마음이 절반이고, 시인사회의 일원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절반이다. 꿈꾸던 시인이라는 것도, 시인사회의 일원이라는 것도 내게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내게 중요한 건 시를 쓴다는 행위일 뿐이다.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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