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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한혜정 칼럼] 어린이집 예찬

등록 2015-07-28 18:33수정 2015-07-29 11:20

“오늘은 소방대피 훈련을 했습니다. 미리 설명했지만 ‘불이야’ 소리에 무섭다고 울었어요.^^” “네, 큰 소리에 민감한 듯해요. 마침 연기 나는 곳을 지나다 설명해주었습니다. 울 일이 아니라 넘어지지 않게 나와야 한다고.” “혓바닥을 보여주며 깨물어서 아프대요. 뭐 먹다 깨물었느냐고 물으니 자다가 깨물었다네요.” “오늘 영재 부모님 오셔서 함께 피자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앞으로 이야기도 꾸며서 할 거예요. 경험한 거, 책에서 본 거, 꿈꿨던 거…….” “아이 여럿, 상처 하나 안 나고 다니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이번 시골 가서 발톱 부러지고 얼굴 긁히고 손 두 군데 생채기…….” “오늘 혼자 블록을 하다 뒤늦게 함께 했어요. 내일 뮤지컬 보러 가니 원복 입혀서 보내주세요.” “혼자 집중하는 시간 존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전에 잘 놀고 점심때 열이 좀 올랐습니다. 환절기라 감기로 아이들이 힘들어하네요.” “별님 반에 올챙이 다섯 마리가 왔어요.” “밥도 잘 안 주고 키우다가 앞다리 나고 뒷다리 나고를 봤던 기억이…….” “밥을 어떻게 주죠? 도움이 된다면 날파리라도 잡아갈게요. 올챙이 가족 환영합니다~”

손자가 다니는 어린이집 선생님과 아이 엄마 사이에 오간 편지글이다. 사진도 종종 붙여져서 오고 일년치 성장을 담은 파일도 온다. 손자는 아파트 놀이터 앞에 있는 가정어린이집에 다닌다. 정원은 19명. 외국의 훌륭한 어린이집을 많이 다녀보았지만 손색이 없는 곳이다. 두 아이 손수 키운 피아니스트 출신 원장은 자녀를 키우면서 그 일이 자기가 즐기는 일임을 알게 되어 어린이집을 열었다고 했다. 담임도 두 아들을 보내다가 원장의 권유로 이곳 보육교사로 일하게 되었는데 그 눈길과 손길이 참 믿음직스럽다. 아이는 담임과 원장 선생님을 좋아하지만 식사 담당 선생님과 책 읽어주는 할머니 선생님도 잘 따른다. 어린이집에서는 동네 개천과 숲, 마을 도서관과 소방서와 공룡 박물관 등을 두루 다닌다. 그 덕에 세 살 반밖에 안 된 아이가 벌써 마실가는 재미를 톡톡히 알고 있다. 여기에 매월 보내오는 건강 식단을 보면 세금 내는 것이 아깝지 않다. 오전 간식은 제철 과일, 두유, 점심은 기장밥, 건새우뭇국, 닭고구마조림, 애호박나물, 깍두기, 오후 간식은 비빔국수. 미국에서 살다 온 한 엄마는 비용도 비용이지만 점심 도시락을 싸지 않아도 되고 매일 운전을 해서 데려다주지 않아도 되는 거리에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네 어린이집이 있어 참 행복하다고 했다. 어린이집 아동학대 건으로 흉흉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나는 현재 한국의 보육환경은 꽤 괜찮게 진화 중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보육은 지자체들이 관심을 쏟아야 할 영역인데 마침 서울시에서 ‘보육교사 현장업무 줄이기 4대 대책’을 발표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그간 보육교사들은 아이를 돌보고 그의 성장을 고민하고 부모와 나누는 일만으로도 벅찬데 갖가지 행정서류, 재무회계, 입학상담 등 과외의 업무까지 해내야 했다. 이런 고충을 알게 된 서울시는 경력교사들과 업무를 분석하고 현장의 목소리를 수렴하여 근무 환경 개선을 위한 권고안을 마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법적 조치가 아닌 권고안이라고 하니 내게는 더욱 반갑게 들린다. 1인당 국민총생산이 3만달러를 기록하는 나라에서는 법적 제재는 적을수록 좋다.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이번 서울시 권고안은 과도한 업무를 줄이는 방안에 초점을 맞춘 것인데 다음에는 동네 가정 어린이집들이 많이 만들어지는 방안이 담겨 있는, 좀 더 적극적인 권고안을 기대해본다. 나는 막 대학을 졸업한 보육 전공자들보다 돌봄에 탁월한 능력을 갖춘 ‘엄마 경력자 선생님’들이 많은 어린이집을 선호한다. 그런 엄마들이 삼삼오오 다양한 어린이집을 열고 운영하게 된다면 부족한 보육시설 문제도 해결하고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도 달리 풀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아이와 지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할머니들과 청년들이 수시로 참여하는 어린이집에는 폐회로티브이 같은 것을 설치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돌봄 사회로의 전환은 바로 제대로 된 동네 어린이집에서 시작된다.

조한혜정 문화인류학자·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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