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으레 다툰다. 지체 높은 재벌가 사람들이라고 반드시 도덕군자여야 한다는 법은 없다. 가족 사이에 간혹 볼썽사나운 막말이 오가기도 할 거다. 외려 인간적인 풍모를 풍길지도 모른다. ‘자연인’의 테두리 안에선, 일단 패스!
문제는 다툼의 규칙이고, 다툼에 걸린 판돈이다. 세속의 이해관계가 얽힌 다툼일지라도 사회질서에 어긋나는 수단을 사용하는 건 곤란하다. 하물며 총수 일가의 경영권 분쟁이라면 공정한 규칙의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 없다. 법률로 정해진 제도(이사회·주주총회)를 무력화시킨다거나, 총수 또는 총수 일가라는 위세를 내세워 경영진을 줄 세우는 따위의 행위는 엄연히 반칙이다. 판돈만 해도 그렇다. 지분 0.05%를 쥔 총수, 2.41%를 쥔 총수 일가가 주인공인 혈투다. 싸움은 ‘그들끼리’ 벌이는데, 자기(네) 돈의 40~2000배 가까운 ‘남의 돈’이 판돈으로 내걸렸다. 물론 싸움에서 이기면 몽땅 독차지다. 자산 규모 93조의 기업군, 수십만의 종업원과 그 가족, 주주, 고객 그리고 국민경제의 위상을 볼모로 잡은 그들만의 ‘노 리스크, 슈퍼하이 리턴’ 다툼이다. ‘이익은 내 것, 위험은 네 것’. 이건 결코 자연인의 지지고 볶는 다툼이 아니다.
한국의 재벌이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한국 대기업의 사전엔 두 종류의 ‘오너’(owner)가 있다. 둘 중 훨씬 자주 쓰이는 건 창업자 혹은 총수라는 뜻의 오너다. 총수(창업자)의 혈통을 물려받은 피붙이들도 테두리 안에 포함된다. 언론조차 아무런 의심 없이 즐겨 사용하는데, 속된 말로 오너란 표현이 왠지 더 폼 난다. 함부로 넘볼 수 없는 권위의 냄새가 풍겨서다. 단어의 원뜻에 가까운 두번째는 ‘소유자’ 혹은 지분을 가진 사람 정도의 오너일 텐데, 말하자면 이론상 기업의 주인이라 할 주주를 일컫는다. 어느 나라나 현실적으로 최대주주는 자신이 보유한 소유권을 능가하는 의결권을 행사하는 법이지만, 한국의 재벌처럼 실제 지분과 그룹 지배력의 괴리 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곳은 없다. 결과는 (첫번째) 오너가 (두번째) 오너를 멀리 쫓아낸 꼴이다. 일찍이 귤이 회수를 건너 탱자가 되었듯이, 오너란 단어가 우리 땅에 들어와 의미가 변질한 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막장 드라마의 먼 배경쯤 되겠다. 2015년 여름, 잠시 롯데가 삼부자로 빙의한 재벌 총수 일가는 우리 사회에 널려 있다. 스스로 주인공이 돼 무대에 설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뿐.
롯데 사태는 하루아침에 끝나진 않을 거다. 주주총회라는 형식적 단계를 넘어서야 하고, 그러고도 지루한 법적 공방이 이어질 수 있다. 어쨌거나 승리를 거머쥔 쪽은 주총 승리(혹은 승소)로 사태가 ‘해결’되었노라 행동할 것이다. 흐트러진 분위기를 다잡겠다며 그룹의 새로운 경영비전을 제시할 테고, 사회와 국민 앞에 잠시 머리를 조아리고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는 명분 아래 ‘통 큰’ 선물 보따리를 풀어댈지도 모른다. 뻔히 예상되는 장면이다. 그렇게 롯데 사태는 서서히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져 갈 것이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하는 건 롯데 사태의 향배가 아니라, 언젠가 찾아올 사태의 ‘해결’을 통해 슬그머니 잊혀갈 재벌체제의 폐해다. 족벌의 가문회의가 이사회와 주주총회를 밀어내고, 총수와 그 피붙이들이 기업의 오너를 참칭하는 거꾸로 선 현실 말이다. 이런 토양 위에서만 지탱 가능한 재벌체제라면, 경쟁력은 고사하고 아예 없으니만 못하다. 일자리와 성장의 기관차이기는커녕, 그저 우리 경제의 짐일 뿐이다. 재벌개혁의 필요성을 우리 사회에 다시 일깨워준 건 롯데 사태가 준 값진 선물이다. 한여름 무더위에 불쾌감을 더한 막장 ‘롯데시네마’를 지켜본 본전은 뽑아야 하지 않을까.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최우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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