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 내내 방을 보러 다녔다. 늘 생각만 하던 ‘자취’를 실제 행동으로 옮겨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온갖 주거형태에 대한 정보와 자취의 노하우가 제공되는 인터넷카페와 앱들은 그야말로 ‘신세계’라 할 만했다. 거기 소개된 수백개의 방을 사진으로 본 다음, 마음에 드는 몇 곳을 직접 방문하는 일을 거듭하는 게 ‘방 구하기’의 전형적인 방법이었다. 낯선 동네를 헤매며 내 한 몸 누일 곳을 찾는 일, 그리고 그것을 계속 거절당하는 일은 내게 아주 깊은 ‘위축’의 경험을 남겼고, 자취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도 금세 사그라들었다. 집 떠난 친구들이 왜 그냥 본가에 꼭 붙어 있으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나 같은 청년들이 아주 많다는 사실이었다. 열 개의 방을 보는 건, 열 명의 삶을 방문하는 것과 같았다. 그 방들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그들이 여기 살았으므로 나도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했고, 다시 조금 용기가 났다. 그런 뒤늦은 ‘재사회화’의 경험을 하고 나니, 부동산 업자들이 보여주는 방과 그곳의 살림들이 왠지 낯설지가 않았다. 좁은 방에 이런저런 살림을 부려놓고 복닥거리며 사는 내 모습이 별 이질감 없이 상상됐다.
그 와중에 흥미로운 건, 주인 없는 집의 방문을 무람없이 열어젖히며 혀를 끌끌 차는 일부 집주인들과 부동산 업자들의 태도였다. 그들은 여기저기 널브러진 가재도구와 옷가지들을 내려다보며, ‘젊은 애들은 왜 이렇게 정리도 안 하고 사냐’고 한숨 쉬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월세 좀 낮춰줄 순 없나요?’ 따위의 질문을 받으며 살 이들이 보기에, 이 방을 거쳐가는 청년들은 참으로 한심하고 대책 없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수납은커녕 두 발 뻗기에도 비좁은 그 방에서 물건들을 일일이 정리하며 산다는 게 더 불가능한 일 같았다.
그러고 보니 숱하게 들어왔다. ‘청년들은 왜 저항하지 않는가, 젊은 세대는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 젊은 비평가들은 왜 침묵하는가’ 등등. 하지만 ‘젊은 세대’가 처한 저항 불가능의 조건과 침묵의 구조를 묻지 않는 이 물음들은 폭력적이다. 비록 그게 기성세대가 독점하는 권력과 발언권을 축소시켜야 한다는 ‘바람직한’ 취지의 질문이라고 해도 그렇다. 애당초 ‘권력’이란 대상이 놓인 위치와 조건에 무관심할 수 있는 자유에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그 물음들은 우선 질문자에게 되물어져야 할 것이다.
‘젊은 세대’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기성세대의 관용과 시혜를 바란다는 말이 아니다. 흔히 비판되는 것처럼 ‘어설픈’ 세대론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문제를 세대론으로 접근하는 것에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세대론적 문제’ 자체를 비가시화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주거, 노동, 여가, 연애, 소비, 건강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보이는 ‘젊은 세대’의 존재방식은 우리 사회의 성격과 건강성을 가늠할 수 있는 리트머스지와 같다. 그것이 ‘젊은 세대는 왜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의 효용이, 단순한 멸시나 질타를 넘어 더 폭넓게 사고되어야 하는 이유다.
무엇보다 젊은 세대 스스로도 그 질문을 ‘신자유주의적 경쟁에서 패배한 개인들의 변명’으로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개인의 성실함과 탁월함은 이 사회의 병리적 구조와 무관하지도, 그것을 뛰어넘을 만큼 전지전능하지도 않다. 우리의 행복과 불행은 반드시 다른 누군가와 연루되어 있으니 말이다.
오혜진 근현대문화 연구자
오혜진 근현대문화 연구자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