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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백숙집에서 국밥집 가는 길의 동묘 / 유홍준

등록 2015-08-20 18:41수정 2015-08-20 22:00

서울에서 가장 낙후되었다는 창신동에 20세기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박수근과 백남준의 집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백숙집에서 국밥집까지 400미터. 그 길이 문화적으로 살아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보니 그 사이에 있는 동묘(東廟)가 생각났다.
인생을 사는 방법은 인간 수만큼 다양하다고 할 것인데 내가 택하고 싶은 길은 미술사가로 살아가는 것이었고 결국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내가 원하는 연구실을 갖기까지 내 삶의 과정은 간단치 않았다.

미술사가로 살아가려면 대학교수가 되든지, 박물관 학예원이 되어야 하는데 유신헌법에 반대한 민청학련 운동에 가담한 죄로 감옥까지 살고 32살에 겨우 대학 졸업장을 받은 나에게 그런 자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서 약간 옆으로 돌아 미술평론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영남대 교수가 되면서 나는 서서히 미술평론을 떠나 미술사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내가 미술사가로 살면서 마음먹은 궁극적인 학문 목표는 ‘인간학으로서 미술사’, 구체적으로 작가론이었다. 예술도 결국은 인간의 일이라는 생각을 굳게 믿으며 죽기 전에 우리나라 화가 20명의 전기를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역사비평>에 연재하여 9분의 전기를 펴낸 <완당평전>과 <화인열전>이다. 개정판을 내려고 절판시켰지만 몇 권 더 펴낸다는 마음을 버린 적이 없다.

어쩌다 가볍게 시작한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뜻밖의 반응을 일으켜 지금껏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여 미루어두었을 뿐이다. 그 <화인열전>의 마지막 권은 현대미술의 거장들로 이루어질 것인데 조선시대에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추사 김정희가 있다면 20세기에는 누가 있을까. 최소한 김환기, 이응로, 박수근, 백남준은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이분들을 기리는 사업은 전기를 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미술사가의 사회적 임무라고 생각했다. 내가 제주추사관 건립을 추진하여 지금도 명예관장으로 있고, 양구의 박수근미술관 건립에 앞장서서 7년간 명예관장을 지내고, 홍성의 이응노의 집(이응노 생가 기념관) 개관 준비 때부터 운영위원장으로 일한 것, 수화 김환기 40주기를 맞아 두 차례 강연을 하고 신안군의 먼바다에 있는 안좌도 김환기 생가에 회원을 모집하여 다녀온 것은 재능기부의 차원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6년 1월29일 백남준 선생이 뉴욕에서 타계하셨을 때 나는 문화재청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나는 빈소를 덕수궁 석조전에 마련하자고 내각에 제시했으나 정부에서 그렇게 한 전례가 없다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 문예위원회, 미협 등의 명의로 꾸몄고 정부측 조문도 뉴욕총영사가 가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내가 가겠다고 나섰지만 문화재청장이 비디오 아티스트 장례식에 간다는 것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에 나는 휴가를 내고 개인 자격으로 뉴욕으로 갔다.

검정 양복에 검정 넥타이를 매고 나섰다. 내 검정 넥타이는 연전에 부친상을 당했을 때 장례식장에서 산 것이어서 조금 후줄근했다. 나는 공항 면세점 명품가게에 들러 빳빳하게 면이 똑바로 서는 검정 넥타이로 바꾸어 맸다. 그렇게라도 해서 내가 보낼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장례식장에는 내로라하는 현대미술인들이 다 모였다. 나는 1996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로서 같이 일한 외국인 평론가들을 반갑게 만날 수 있었다. 앞줄 한쪽엔 부인 구보타 시게코 여사와 존 레넌의 부인 오노 요코가 있었고, 나는 그 건너편 뒷줄에 앉아 있었다.

장례식은 여러 예술인들의 조사 아닌 회고담으로 이어졌다. 우리와 달리 웃으면서 고인을 보내는 것이었다. 식이 끝나고 운구할 시간이 되자 사회자가 갑자기 가위를 조문객들에게 나누어주며 옆에 있는 사람의 넥타이를 잘라 관 위에 바치라는 것이었다.

1960년 젊은 시절 백남준은 쾰른의 메리 바워마이스터 아틀리에에서 열린 퍼포먼스 때 피아노를 치다가 갑자기 객석에 앉아 있는 존 케이지의 넥타이와 연미복 꼬리를 가위로 잘라 버린 일이 있었다. 기존의 권위와 가치를 그렇게 쌍둥 끊어 버렸던 백남준을 회상한 것이었다. 내 옆에 있던 평론가 바버라 런던과 김홍희(서울시립미술관 관장)씨는 내 넥타이를 한 가닥씩 끊어 갔다. 나는 목에 맨 넥타이 조각을 풀어 백남준 선생의 가슴 위에 얹으며 마지막 인사를 보냈다. 나의 멋진 명품 검정 넥타이는 그렇게 백남준과 함께 갔다.

올해는 박수근 선생 서거 50주년이 되는 해로 지난 5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이간수문 전시장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나는 추모전 운영위원장을 맡아 두 차례 강연과 가까이 있는 창신동의 ‘박수근이 살던 집’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가졌다. 이 행사를 주관한 박삼철 기획본부장이 저 윗동네에 ‘백남준이 어려서 살던 집’이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라고 기뻤는지 모른다.

가서 보니 백남준은 부잣집 아들이어서 크고 번듯한 한옥 여러 채가 다 그의 집이었다고 한다. 그중 한 집은 지금 백숙집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여기서 400미터를 내려간 한길가에 박수근이 살던 집이 있는데 국밥집으로 되어 있다. 함께 간 따님(박인숙 선생) 하시는 말씀이 다 바뀌었지만 처마의 홈통만은 50년 전 살던 집 그대로라고 했다. 나는 그 홈통에 “박수근 화백이 사시던 집”이라고 지워지지 않는 유성붓펜으로 써놓았다. 나중에 이를 본 박원순 시장이 나에게 “왜 길거리에 낙서를 하고 다니세요”라며 즐거운 농담을 보냈다.

서울에서 가장 낙후되었다는 창신동에 20세기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박수근과 백남준의 집이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이것은 창신동의, 아니 서울의 엄청난 문화적 자산임에 틀림없다. 백숙집에서 국밥집까지 400미터. 그 길이 문화적으로 살아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고 보니 그 사이에 있는 동묘(東廟)가 생각났다.

동묘는 관운장을 모신 사당으로 정확히는 동관왕묘(東關王廟)이다. 조선왕조는 성균관에 문묘(文廟)를 모셨으면서 무묘(武廟)는 세우지 않았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하여 1601년에 완공하였다. 관왕묘는 처음에는 남묘가 먼저 세워졌고 뒤이어 동묘, 서묘, 북묘가 건축되었으나 현재는 동묘만 남은 것이다.

이 동묘의 건축은 중국풍이면서도 조선적인 세련미가 들어가 있는 멋진 건물이어서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안에는 17세기에 제작된 부리부리한 관운장상과 그의 아들 관평 등 4명의 장수가 모셔져 있다. 오른쪽 건물인 서무에는 숙종과 영조가 쓴 비석이 있고, 왼쪽 동무에는 사도세자가 지은 글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쓴 비석이 있다.

이처럼 역사적 유래가 깊은 관왕묘는 중국에도 드물다. 아시다시피 중국인들이 행복과 재물을 다 가져다주는 신으로 모시는 분은 부처님도, 예수님도, 모택동(마오쩌둥)도 아니고 관운장, 중국식으로 관제(關帝)이다. 관제묘가 없는 마을이 없고, 정초에 복을 비는 연화(年畵)는 다 관운장 초상이다. 중국인들은 관제묘 앞을 절대로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유커들에게 개방하여 재복을 빌라고 하면 너나없이 달려올 엄청난 관광자원이다.

나는 동관왕묘가 유커들의 성지가 되어 창신동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그려본다. 지금 동묘 앞은 주말이면 엄청난 벼룩시장, 구제품시장이 열리고 옛 향수를 즐기는 어르신들로 만원을 이루어 ‘60대 홍대 앞’이라고 불린다. 여기에 20세기 현대예술의 혼이 서려 있는 백숙집에서 국밥집까지 400미터의 거리를 새롭게 디자인한다면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서울시는 벌써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이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내년은 백남준 선생 서거 10주기가 되는 해이다. 창신동과 동관왕묘를 알릴 절호의 찬스다. 그때 내가 또 무슨 일을 벌일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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