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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지석 칼럼] ‘김정은표 개방·개혁’의 성패

등록 2015-08-31 18:39

지난 여러 해 동안의 남북 관계에 비춰 볼 때 8·25 남북 합의는 돌출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북 강경론을 위주로 하는 보수정권의 정책 기조를 훼손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유연성을 보였다. 임기가 절반을 넘어섰음에도 남북 관계가 꽉 막혀 있는데다 대외 관계에서 운신의 폭을 넓혀야 하는 사정 등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더 주목되는 북한의 의도다. 4년 가까운 김정은 집권 기간 동안 대남·대외 관계를 다 합쳐서 이번만큼 눈에 띄는 합의를 이뤄낸 적이 없다. 이 합의는 상황 관리와 전략적 목표 추구라는 측면을 모두 갖는다. 합의의 파장은 앞으로 북쪽의 선택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북한은 약자다.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자신보다 약한 세력은 없다. 게다가 북쪽이 보기에 대부분 적대적이다. 약자가 자신의 정체성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는 강한 세력에 대해 대응하는 방법은 크게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동화(assimilation)다. 강자를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맞춰가는 것이다. 이는 약자의 전략일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강자는 직간접적으로 약자의 동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저항이다. 강자의 영향력을 배제한다는 분명한 목표를 설정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이는 고난의 길이 될 수밖에 없으며 성공 여부 또한 불확실하다. 셋째는 타협이다. 동화와 저항의 중간인데, 자칫하면 기회주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잘 설정된 중용은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강자와 협력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이화(dissimilation) 또는 이탈이 있다. 이화는 강자가 주도하는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정체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화와 정반대다. 이 시도가 성공하면 이탈이 된다. 이화는 대개 강자의 압박을 유도하는 탓에 저항을 동반하기가 쉽다. 지금 지구촌에서 이화의 대표적인 사례가 이슬람국가(IS)다. 북한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이화 노선을 걸어왔다. 북쪽 정권은 이를 ‘우리 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북쪽은 핵개발이 이 길을 보장하는 수단이라고 주장한다.

소규모 공동체가 아닌 나라 차원에서 이화는 아주 어렵다. 지구촌 전체가 복잡하게 얽힌 시대에 고립 속에서 다른 길을 찾는 것이어서 저항보다도 몇배나 힘이 든다. 북한처럼 지정학적 요충지에 있는 나라는 더 그렇다. 시간이 가면서 모순이 쌓일 수밖에 없다. 현대사에서 가장 근본적인 이화 사례인 소련이 결국 체제 유지에 실패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북쪽에는 대안이 필요하다. 다른 탈출구를 찾기 어려운 북쪽은 지난해부터 남북 관계 개선을 집요하게 추구했다. 그 결과물이 8·25 합의다.

이 합의는 그 자체만으론 오래 굴러갈 수가 없다. 남북 교류·협력은 어느 순간부터 국제적인 대북 제재와 충돌하고 핵 문제라는 장벽에 맞닥뜨린다. 북쪽도 이를 잘 안다. 따라서 북쪽이 8·25 합의를 성실하게 추구한다면 노선 전환을 피할 수 없다. 타협의 길이 그것이다. 이는 협력의 길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는 개방이다. 남북 관계가 더 크고 다양한 개방의 지렛대가 되는 것이다. 개방과 짝을 이루는 내부 개혁은 이미 상당히 진행됐다. 최근 북쪽에 다녀온 외국인들은 대부분 ‘북한 사람과 체제가 지구촌 다른 곳과 비슷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북쪽이 개방·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지금이 처음이 아니다. 김정일 정권 때인 2000년대 초반에 지향점이 더 분명했다. 하지만 강고한 기득권 세력의 벽을 뚫지 못하고 진퇴를 거듭하다가 김정일이 숨지면서 체제까지 흔들렸다. 그사이 북쪽에는 시장경제를 맛보고 외부세계에 눈을 뜬 새 세대가 형성됐다. 이른바 장마당 세대다. 김정은표 개방·개혁은 이들을 등에 업고 있다.

김지석 논설위원
김지석 논설위원
북쪽은 지금 어디로, 어떻게, 얼마나 가야 할지 불안해한다. 우리는 북쪽이 문을 활짝 열고 나오도록 지원해야 한다. 우리 또한 그렇듯이 타협과 협력의 길은 항상 옳지는 않더라도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다. 북쪽이 다시 문을 잠근다고 생각할 때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은 지금 이슬람국가의 모습이다.

김지석 논설위원 j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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