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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2030 잠금해제] 화학물질은 사회적이다 / 희정

등록 2015-09-20 18:40

집 근처에 국숫집이 생겼다. 꽤 저렴하다. 하지만 가지 않는다. 구인광고에 제시한 임금이 최저시급을 한참 못 미쳤다. 노동자를 싼값에 부려서 안 가냐고? 아니다. 내가 먹을 음식이 걱정돼서다. 눈앞에서 일하는 사람의 처우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장이 과연 손님 건강까지 챙길까. 임금도, 재료비도, 위생비용도 결국 돈이다.

공업품도 마찬가지. 노동환경이 기준미달이면, 그곳에서 생산한 상품도 기준미달이다. 불량이 나면 차라리 다행.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 미달일 경우가 있다. 재료비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소비자 눈에 결코 보이지 않는 부분, 화학물질.

툭하면 임금체불에 철야인 회사가 생산에 사용되는 화학물질은 구성성분을 꼼꼼히 살필까. 뭐가 들었는지 사장도 모른다. 그냥 싸면 쓰는 거다. 싼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한해 국내에 유통되는 1억5천만톤의 발암물질은 어디로 갈까. 그것들이 몇몇 공장에 얌전히 머물러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일부 영세사업장만 유해물질을 사용하는 게 아니다. 정부의 반도체 공장 환경평가를 보면, 수백 종의 유해물질과 1급 발암성 물질들이 확인된다. 최근에도 이런데, 십년 전에는 어땠을까. 반도체 공장에서 일한 이들이 암이나 희귀질환에 걸릴 만하다.

병에 걸린 이들은 8년을 싸웠다. 결국 반도체 회사 삼성에 보상을 약속받았다. 그런데 이 보상 절차가 피해자들도, 함께한 사회단체도 배제된 채 이뤄져 또다시 문제다. 직업병 보상 문제는 조정위원회를 통해 협상 중이었다. 이미 권고안도 나온 상태. 그런데 갑자기 모든 것이 무시됐다. 삼성이 단독으로 보상위원회 발족을 발표한 것이다. 거대기업이 개인을 상대로 피해를 축소하긴 쉽다. 그럴 여지를 없애고 사회적 해결을 위해 조정위원회는 ‘공익법인’ 설립을 권고했다. 그러나 삼성이 택한 것은 자신들의 통제하에 놓인 보상위원회다.

피해자 다수가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역사적 교훈이 있다. 15년 전, 미국 아이비엠 노동자들도 직업병 인정 싸움을 했으나 개별보상으로 마무리됐다. 그로써 작업환경과 질병의 관계를 밝히는 작업은 중단됐다. 증거 자료는 아이비엠 손에 들어갔다. 사건은 묻히고, 그 후 한국을 비롯한 각국 반도체 노동자들은 같은 원인, 같은 질병으로 죽고 병든다.

입막음 식 개별보상은 사건 은폐의 다른 말이다. 재발 방지도 기대하기 힘들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발암물질은 공장 안에 얌전히 머물지 않는다. 기업은 문제를 담장 안으로 가두지만, 발암물질은 사회적이다. 지역으로 퍼진다. 삼성전자 공장 굴뚝 옆 나무만 노랗게 마른다고 했다. 2013년 불산 유출로 노동자 한명이 죽었을 때, 삼성전자는 불산을 송풍기로 배출시켰다. 외부로, 그러니까 학교와 아파트가 있는 지역으로 말이다.

보상 문제를 대하는 삼성의 태도는 평소와 다르지 않다. 사람보다 이윤이다. 제품을 생산할 때 드러나는 무자비한 이윤추구 본성이 상품을 팔 때는 사라질까. 생산자가 위험하다면 소비자도 위험하다. 우리는 바람 불고 물 흐르고, 화학물질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희정 기록노동자
희정 기록노동자
이윤을 벌어들인 이는 삼성 혼자지만, 그 피해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재발 방지를 요구할 권리, 작업환경을 감시할 권리는 우리의 몫이다. 삼성은 돈으로 입막음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문제를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는 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희정 기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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