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당정치가 중도화되어야 한다는, 그 가운데 특히 지금의 야당이 중도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얼핏 그럴듯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실은 숨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중도화란 많은 경우 진보적·개혁적 입장에서 보수화로 가는 중간기착지이기가 십중팔구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 전반이 오래전부터 알게 모르게 보수화되고 있음을 많은 사람들이 느낄 것이다. 그런 가운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약간 개혁적인 새정치민주연합과 약간 진보적이라 할 수 있는 정의당이 있다. 이들의 개혁이나 진보라야 독일 모델이나, 더 나아가서는 스웨덴 모델을 따르고 있는 정도여서, 큰 맥락에서는 오히려 온건하다고 해야만 맞을 것 같다.
그런데도 이들에 대하여 거대 보수언론 등 보수 측에서는 줄기차게 비난을 퍼붓거나 또는 중도화로 유도하는 교묘한 공세를 펴고 있다. 그래서 드디어 야당 안에서도 중도로 전환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온다.
마침 동양 전래의 ‘중용’이라는 사상이 있어 ‘중도’는 그 좋은 개념과 혼동될 수도 있다. 중도란 등거리 유지란 비교적 산술적인 개념에 가깝지만 말이다.
최근에 보수신문을 보니 특히 새정치민주연합이 60년 역사를 기념한다는 행사를 다루는 지면에 중도화하라는 요지의 주장들이 보인다. “중도개혁으로 돌아오라” “‘우클릭·중도화’ 의견 많아” 같은 제목이다.
일반적으로 중도화라고 말할 때 세 가지쯤 다른 차원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정책 그 자체의 중도화, 둘째는 중간층을 흡수하기 위한 선거전략상의 중도화, 셋째는 거친 말과 행동을 순화하는 뜻의 중도화. 여기서 선거전략상의 중도화는 정당의 정체성 변화에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이어서 뚜렷하게 구분짓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이와 같이 정당의 중도화에 관한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 마침 <황해문화> 가을호의 ‘진보와 보수의 이분법을 넘어서’ 특집이 시의적절하게 생각할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특히 그 특집에는 ‘왜 중도를 두려워하는가’(김진석 교수), ‘중도수렴의 확대 경향성과 그 과제’(채진원 교수) 등 중도화를 추진하고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논문 제목들이 있어 더욱 그렇다.
미리 느낌을 말한다면 그 특집은 우선 주는 인상과는 달리 반드시 중도화를 추진하거나 옹호하는 내용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논문들의 현실분석을 보면 오히려 개혁이 절실하다는 점을 뒷받침하고도 있다. 아니, 더 나아가 대담한 개혁정책의 필요성을 말하고도 있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한국사회 이념 갈등 증폭에는 언론의 책임 또한 크다. 언론이 공론장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념 갈등을 조장하는 역기능을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이다.”(윤성이 교수)
“정부, 정당, 시민단체, 언론 모두가 단순하고 획일화된 진보-보수의 틀에서 벗어나 이념과 가치 그리고 이익을 대표하는 구도가 더 다양하고 분산된 형태를 갖춰야 한다.”(윤성이 교수)
얼핏 중도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나 따져보면 옳은 말로 탓할 게 없다.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을 앞두고, 더 많은 중도층 유권자들을 끌어모으기 위한 ‘노선투쟁’을 통해 기회의 창을 만들고 있는 대표적인 정치인은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이다. 유 대표는 좌클릭 노선투쟁을, 문 대표는 우클릭 노선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 두 대표의 좌클릭과 우클릭 목표는 더 많은 중도 유권자층을 획득하여, 오는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는 데 있다.”(채진원 교수)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 등 발언을 예로 들고, 문재인 당대표의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는 발언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채 교수는 그 발언들을 중도층 유권자를 얻기 위한 선거의 득표전략이 비중이 큰 것으로 보고 있는 것 같다.
특집에는 이런 주장들도 나온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 진보정당 등 주요 정당들이 비정규직과 중소하청의 노동자 등 빈곤층으로 전락한 중산층과 중도층을 과소 대표하면서, 상대적으로 상위소득 1%의 재벌과 부자 등 상층자본과 상위소득 9%에 포함되는 민주화 세력, 민주노총, 전교조, 공무원노조,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등 상층 노동자를 과대 대표해왔다는 통계해석과 지적은 정치불신의 배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거를 잘 보여주고 있다.”(채진원 교수)
(김낙년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2000~2012년 동안 소득계층 하위 10%의 평균 실질소득은 6.2% 감소했으며, 경제는 과거에 비해 성장했음에도 하위계층의 실질소득이 줄어들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것은 12년 동안 전체 평균소득의 실질증가는 9.9%에 그쳤으나 상위 10%의 평균 실질소득은 39.3% 증가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채진원 교수)
위의 두 인용문의 내용대로라면 한국 정치는 중도화가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지금 대폭적인 개혁정책이 절실한 때가 아닌가.
그래서 <황해문화>의 이번 특집이 우리나라 정치의 이런 면 저런 면을 생각하게 하는 많은 논점들을 제공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약간의 혼란을 느낀다. 중도화 이야기가 비치는가 하면 개혁의 필요성이 뒷받침되기도 하고…. 하기는 그러한 것이 한국 정치의 현장이기도 할 것이다.
정치평론가 박상훈 박사가 다른 지면에 발표한 ‘한국 사회의 불평등과 정치의 역할’이란 논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한국 정치가 점점 더 중산층 편향적이고 하층 배제적인 방향으로 가고 있다. (…) 노동자의 시민권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그 나라 민주주의의 내용과 질은 크게 달라진다.” 나는 그의 견해에 공감한다. 취업기회의 감소 등 노동환경의 변화가 있어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여야 한다. 그래서 정책이 있고 정치가 있는 것이다. 그게 함께 사는 복지국가의 목표다. 그 점에서도 폭이 작기는 하지만 보수·개혁·진보의 차이는 나타난다. 지금 정부·여당이 몰아붙이는 이른바 노동개혁도 과연 노동자를 위한 것이냐에 의문이 간다. 기업 측에의 부의 쏠림을 가속화시킬 것만 같아서의 이야기다.
한국의 정당정치가 중도화되어야 한다는, 그 가운데 특히 지금의 야당이 중도화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얼핏 그럴듯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실은 숨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여긴다. 중도화론은 알게 모르게 우리 정치를 중성화시키고 무력화시킨다. 중도화란 많은 경우 진보적·개혁적 입장에서 보수화로 가는 중간기착지이기가 십중팔구이기 때문이다.
복지사회를 이룬 선진국에서는 있을 수 있고 타당할 수도 있겠다. 그때의 중도는 균형 잡힌 현실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심한 불평등사회에서 그것은 개혁의 포기이고, 보수에의 동조일 뿐이다. 울부짖는 개혁과제가 쌓이고 쌓였는데 중도란 그럴듯한 안락의자에 앉아 무사태평을 노래하게 한다. 그런 것은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인가.
“보수든 진보든, 왜 이처럼 중도를 강박적으로 지우는가? 그들은 왜 마치 중도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가? 그것이 눈앞에 있는데 왜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일까? 내 생각에 이 물음을 제대로 던지지 않는 한, 중요한 정치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을 듯하다.”(김진석 교수)
이제까지의 나의 논지를 뒤집는 반박 같기도 하다. 옳은 말이라 할 수 있다.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적 태도로는 옳다. 그러나 권모술수의 현실정치세계에서는 맞지가 않는다. 거대 보수언론 등 세력의 야권에 대한 중도몰이는 그들의 뼈대를 빼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정치, 정략의 세계다.
글을 쓰고 나니 학자들의 정교한 연구논문에 주먹구구식 반응을 보인 게 아닌가 염려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마침 동조자가 나왔다. 김갑수 한국사회여론연구소 대표는 최근 <시사인(IN)>에 영국 노동당의 코빈 당수 선출에 관한 글을 쓰면서 이렇게 끝맺었다.
“영국에 명함조차 내밀 수 없을 정도의 불평등과 최악의 실업률 그리고 최악의 노인 빈곤을 이대로 두고 언제까지 중도타령이나 할 건가? ‘심쿵’에 목마른 가슴들에 언제까지 먼 나라 쳐다보며 부러움만 남발하게 할 건가? 쿠오바디스 한국 야당?”
남재희 언론인
남재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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