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과거를 향한 ‘위대한 탈출’ / 최우성

등록 2015-11-03 18:41

최우성 논설위원
최우성 논설위원
꽤 오래전 일이다. 어쩌다 보니 독일 대학에서 몇 년 공부할 기회가 있었다. 틈틈이 역사학과 수업을 들락거렸더랬다. 한국에서 온 학생 눈엔 당혹스런 장면이 종종 연출됐다. 대학 등록금이 없는 나라다 보니 일반 시민들이 스스럼없이 강의실에 들어오곤 했다. 가끔 차마 웃기 힘든 상황도 펼쳐졌다. 족히 일흔은 넘어 보이는 할아버지·할머니 청강생이 ‘젊은’ 역사학 교수에게 당당히 대들 때다. 요지는 ‘내가 겪어봐서 아는데, 당신 얘긴 틀렸다’다. 무턱대고 자신의 경험만 풀어놓는 장광설에 수업이 샛길로 빠진 적도 여러 차례. 그래도 결말은 언제나 해피엔딩이었다. ‘일어난 일’에 의미를 더하고 다양한 해석을 덧붙일 여지를 넓히는 게 역사학의 존재 이유이자, 역사를 공부하는 묘미라는 선에서 무난히 화해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오래전의 에피소드들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역사전쟁’ 탓이려니 싶다. 사람들이 과거를 대하는 태도는 여러 갈래다. 대체로 아쉬움과 애틋함이 교차하는 아련한 추억 어디쯤에 저마다의 과거가 자리잡고 있을 터이나, 간혹 과거를 통째로 기억에서 지워버리거나 혹은 정반대로 오로지 과거에만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과거 강박증’의 대표적 증상이다. 노후 시간을 즐기려고 대학 강의실을 찾는 평범한 할아버지·할머니들이라면 모를까, 한 나라의 정책 결정 집단이 이런 증상을 보인다면 여간 심각한 일이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기어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고시를 확정 발표했다. 압도적인 반대 여론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외골수 행보다. 수북이 쌓인 민생 현안이나 챙기라는 호소와 절규는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를 바로 알지 못하면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고 민족정신이 잠식당할 수도 있다”는 고집스런 과거 타령에 내동댕이쳐졌다. 굳이 따지자면, 최근 논란이 된 앵거스 디턴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저서 왜곡 출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만하다. 일부 언론과 우파 학자들은 ‘인류가 성장이라는 위대한 탈출을 통해 가난을 극복하고 잘살게 됐다’는 저자의 메시지를 시대를 초월한 절대진리인 양 떠받드느라 여념이 없다. 국정 교과서 반대 목소리를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자학사관”으로 매도하는 정부의 행태나, 왜곡 출판 지적에 “대한민국의 성공과 발전을 저주하고 싶은 자들”이라 화답하는 몰염치한 행동은 시쳇말로 싱크로율 100%다. ‘현재와 미래는 과거가 지배한다.’

‘한강의 기적’을 일군 산업화가 우리 사회를 가난의 굴레에서 해방시켰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따라잡기’의 동인이 분명 많은 나라를 성장과 성공으로 이끈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백번이고 옳은 얘기다. 문제는 ‘멋진’ 과거가 아니라 ‘힘겨운’ 현재요, ‘불안한’ 미래다. 성장의 부산물로 등장한 불평등이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강력한 자극제와 성장 사다리가 되어주지 못하는 새로운 환경, 꿈을 먹어야만 쑥쑥 자라나는 자본주의를 시름시름 병들게 만들 만큼 임계치를 훌쩍 넘어선 현실의 불평등 말이다.

자살률 1위와 출산율 꼴찌. 자살률이 현재를 읽는 열쇳말이라면, 출산율은 미래를 엿볼 가늠자다. 우리 사회의 냉정한 현주소를 보여주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잣대도 없다. 당장 현재를 아파하고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들에게 멋진 과거 이야기 따위나 강요하듯 들이미는 건 엄연히 폭력이다. 이들의 과거 강박증은 ‘존재하는 건 곧 정당한 것’이라는 편향된 인식에서 싹튼 것이겠으나, 실은 엄연한 현실의 난제들과 당당히 맞서지 못하는 무능력을 감추려는 생존본능의 발로일지도 모른다. 현재와 미래에 눈 감고 귀 닫은, 과거를 향한 ‘위대한 탈출’!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몰아서 일하기와 노동시간 유연화에 대한 환상 [아침햇발] 1.

몰아서 일하기와 노동시간 유연화에 대한 환상 [아침햇발]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2.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사설] ‘내란 수사 대상자’ 서울경찰청장 발령 강행한 최상목 3.

[사설] ‘내란 수사 대상자’ 서울경찰청장 발령 강행한 최상목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4.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검찰권으로 정치보복 ‘미국의 윤석열’은 어떻게 됐을까 5.

검찰권으로 정치보복 ‘미국의 윤석열’은 어떻게 됐을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