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가 <사격 회화>로 데뷔해 이미 반세기가 지났으나 그 작품은 아직 낡지 않았다. 남성원리가 의기양양하게 지배하는 사회에서 니키는 결코 낡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올해부터 근무처인 대학에서 ‘예술학’이라는 강의도 맡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인권’과 ‘예술’ 두 분야를 가르치는 별쭝난 대학교수인 셈이다. 한데 나 자신은 이 두 분야가 서로 깊이 연관돼 있다고 보기 때문에 위화감은 없다. ‘인권’도 ‘예술’도 단적으로 말하면 모두 ‘인간’의 일이기 때문이다.
과거 나치스나 대일본제국(일제)의 예를 들 것까지도 없이 국가권력은 (가부장제나 상업주의 권력까지도) 사람들의 감성 밑바닥까지 침투해 통제하려고 하는 법이다. 바로 그 때문에 개개인의 존엄이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감성의 차원에서 권력으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내가 학생들을 만날 때 신경을 쓰는 것은 그들의 감성을 해방하고 자발성을 발양하는 일이다. 이는 ‘인권’에 대해서도 마찬가진데, 아무리 교의나 지식으로 ‘인권’을 가르치려 해도 그 개개인이 자발적으로 타자나 약자에 대한 상상력과 공감을 발휘하지 않는 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예술학’ 강의를 할 때, 맨 처음에는 아무 설명도 하지 않고 예술작품을 보여준 뒤 뭐든 좋으니 느낀 것을 글로 적어 보라고 얘기한다. 이 “뭐든 좋으니”가 학생들에게는 어려운 모양이다. 학생들은 당혹스러워하면서 “이 작품의 작가는 누구입니까?”라거나 “어느 시대 작품입니까?” 등의 질문을 한다. “그런 건 신경쓰지 않아도 좋아요. 이 작품을 잘 살펴본 뒤 의문이든 반감이든 괜찮으니까,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걸 써 보세요” 하고 나는 대답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더욱 곤혹스러워한다. 하다못해 작가명이나 작품명 같은 정보라도 있다면 스마트폰으로 검색이라도 해볼 수 있을 텐데….
학생들은 만사 교수(어른)의 안색을 살피면서 허가나 지시를 받으려고 한다. 그것은 학생들의 책임이라기보다 그런 식으로 그들의 감성을 가둬버린 어른들의 책임이다. 적어도 내 강의에서만이라도 자유롭게 느끼고 자유롭게 발언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예컨대 고흐가 말년에 그린 밀밭 그림을 보여주고, 그게 무엇인지 물어보면 학생들은 “밀밭입니다” 하고 대답한다. “맞아요. 하지만 그걸 물은 게 아니에요. 이 그림 자체와 대화하고 느낀 바를 말로 표현해 주세요.” 그러면 학생들은 입을 다물어 버린다. 꽤 참을성 있게 기다린 뒤, 이 그림은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에 그린 것인데,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극도의 비애”를 여기에 표현했다고 써 놓았다는 설명을 해준다. 그러면 마침내 (조금씩이긴 하지만) 학생들은 작품과 마음으로 대화하기 시작한다. 순서를 그 반대로 해선 안 된다.
그런데 얼마 전 강의 뒤 한 여학생이 다가와 “선생님, 저 다녀왔습니다” 하고 말했다. 지금 도쿄 롯폰기의 국립신미술관에서 ‘니키 드 생팔’전이 열리고 있다. 나는 강의 중에 “가능하면 가 보도록” 학생들에게 권했다.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미술전시회에 가는 경우는 유감스럽게도 매우 드물다. 무엇보다 미술관은 그들에게 딱딱하고 문턱이 높다. 작품을 어떻게 봐야 좋을지 모른다. 게다가 그들에겐 입장료가 비싸다.(영국은 원칙적으로 무료다.) 그리고 그들은 바쁘다.
그런데 이 학생은 제 발로 니키전을 보고 왔다고 한다. 평소 말수가 적은 학생으로, 나하고 허물없이 말을 주고받는 사이도 아니다. “어땠어요?” 하고 물어보니 “정말 좋았어요…”라는 대답. “어떻게 좋았는지, 다음 수업 때 보고해 보세요”라고 하자, 긴장한 표정으로 “해 보겠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니키 드 생팔은 1930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여성 아티스트다. 2002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72살로 삶을 마감했다. 내가 니키 원작을 처음 접한 것은 1983년에 처음으로 유럽에 갔을 때다. 파리 퐁피두센터 인근의 스트라빈스키 광장에 설치해 놓은 니키와 그의 파트너 장 팅겔리 공동작품인 분수를 봤다. 그다음에 그의 작품을 본 것은 1986년 일본 오쓰시 세이부 백화점에서 열린 개인전에서였다. 그 이후 완전히 니키에 빠져서 바젤의 팅겔리 미술관에도 가 봤다. 나도 니키 덕에 눈을 뜨게 된 사람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니키가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60년대 초의 <사격 회화>를 통해서다. 화구를 담은 자루나 병을 그림 표면에 붙이고 석고를 발라 굳힌 다음 좀 떨어진 곳에 서서 소총으로 그걸 쏘는 것이다. 니키의 총탄은 누구의 무엇을 겨냥한 것일까. “대디(아빠)? 모든 남성?… 아니면 내가 쏜 그림은 나 자신이었나?… 나 자신을 쏘는 것으로 정의롭지 못한 사회를 쏘고, 시대의 폭력을 쏘았다.”
니키는 부유한 상류계급 자녀였는데, 그 자신의 얘기로는, 11살 때 아버지한테 성적 학대를 당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으나 이혼한 뒤 아티스트가 됐다. <라이프>나 <보그> 표지를 장식한 인기 모델이었지만 그 직업도 버렸다. 니키는 인터뷰에서 “나는 예술계의 테러리스트가 됐다”고 말했다. 여성이 기성 권위에 맞서는 것은 글자 그대로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만큼의 용기가 필요한 시대였다.
그다음 주에 그 여학생은 학생들 앞에서 당차게 보고했다. 착실하게 조사해서 준비해 온 것도 좋았지만, 니키의 예술을 얘기하면서 예전 같으면 학우들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을 자신의 고립감이나 마음의 고통에 대해서도 용기를 내서 얘기한 게 더 좋았다. 그는 그 <사격 회화>에 완전히 매료당했다고 했다. “내 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총탄에 맞은 것 같았습니다. 나도 느낀 대로 얘기해도 된다고 격려해 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니키의 예술이 여학생의 마음을 열고 용기를 발휘하게 해준 것이다.
니키는 그 뒤 ‘사격 회화’에서 퉁퉁한 형태와 극채색을 특징으로 하는 ‘나나’(Nana) 시리즈로 옮겨간다. 그것은 임신한 친구의 모습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남성 중심주의가 이상화한 여성상 따위와는 다른, 생생하고 개방적인 역동성으로 가득 차 있다. 석기시대의 비너스상과 같다.
니키는 팅겔리와 함께 1966년 스톡홀름 근대미술관에서 <혼>(Hon)이라 불린 작품을 제작 전시했다. 그것은 길이 28m, 너비 6m나 되는 거대한 나나였다. 관람객은 미술관 홀 입구에서 다리를 벌린 채 맞이하고 있는 이 여성상의 성기 속으로 들어가 몸속을 관람한다. 독일 하노버 시립공원에는 커다란 나나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를 두고 시민들 사이에 찬반양론이 벌어졌다고 한다. 어느 다큐멘터리 영화에는 그곳 노부인이 이 상을 가리키면서 “만일 총통이 건재했더라면…” 하고 몹시 불쾌한 듯 투덜거리는 장면이 나온다. 히틀러라면 그걸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니키 예술의 가치를 역설적으로 말해주는 장면이다.
니키는 1984년부터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에 땅을 얻어 <타로 가든> 제작을 시작했다. 타로 카드에서 구상을 얻은 <정의> <악마>라는 큰 조형물이 배치된 널따란 정원이다. 니키는 남성 원리가 전쟁과 환경파괴의 원흉이라는 사상을 실천하면서 여성 원리와 ‘마술성’의 가치를 강조했다. 타로 가든에는 거대한 손 조형물이 있다. 그 손은 거기에서 약 20㎞ 떨어져 있는 원자력발전소 쪽을 향하고 있는데, “원전이여, 멈추어라”라는 염력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뒤 이탈리아에서는 격렬한 논란 끝에 원전 가동을 중단했다. 그것은 타로 가든 손의 힘 덕이었다고 니키는 말했다.
일본에서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난 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은 올해에 많은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고 가고시마현 원전을 재가동했고, 나머지 원전들도 차례차례 재가동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니키가 <사격 회화>로 데뷔한 시대로부터 이미 반세기가 지났으나 그 작품은 아직 낡지 않았다. 그것은 동시에 여성이나 소수자에 대한 억압이 (겉으로는 어찌됐든) 근본적으로 개선된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일본은 국회의원의 여성 비율(8.1%)이 세계 129위인 나라다.(한국도 16.3%, 87위로 낮다. 세계의회연맹조사, 2014년 11월 현재.) 남성 원리가 의기양양하게 지배하는 사회에서 니키는 결코 낡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