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맘때쯤 서점의 매대를 뒤덮는 각종 트렌드 예언서들은 어김없이 2016년에도 ‘소셜’의 확고부동한 존재감을 한목소리로 점치고 있다. 연결되고, 공유하는, 손안의 세상쯤으로 으레 받아들여지는 소셜이란 수식어의 깔끔한 이미지는 그 무엇도 넘볼 수 없는 절대진리의 자리에 등극한 지 오래다. 소셜미디어, 소셜네트워크서비스, 소셜마케팅, 소셜코머스, 소셜펀딩, 소셜픽션…. 가히 이 땅은 소셜의 전성시대요, 소셜의 천국이다.
그럼 여기는 또 어디일까. 자살률과 노인빈곤율은 으뜸이고 출산율은 꼴찌인 기묘한 세상. 공권력이 정면으로 겨눈 물대포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는 비무장 노인에게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조차 거둔 메마른 세상, 집회의 자유에 폭력이란 딱지부터 들이대는 꽉 막힌 세상. 어디 그뿐이랴. 보잘것없던 안전장치마저 개혁이란 이름 앞에 무장해제되는 헐벗은 세상. 국가와 시장의 협공에 한껏 쪼그라드는 ‘사회’. 분명 이 땅의 또 다른 얼굴이다.
소셜의 풍요와 사회의 빈곤. 2015년 끝자락 우리 눈앞에 펼쳐진 이 해괴한 역설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에둘러 가보자. 근대 이후 인류 역사에서 무릇 사회의 값어치는 국가와 시장의 완충지대 노릇을 톡톡히 해낼 때 가장 빛났다. 국가의 전횡에 당당하게 맞서면서도 시장의 독주에 적절히 제동을 거는 제3지대의 역할 말이다. 이처럼 사회가 구성원들의 삶을 떠받치는 탄탄한 버팀목이 된 비밀은, 외려 무균질하고 무질서하며 지저분하고 혼란스러운 속성에 있다. 애초부터 사회란 말 그대로 잡탕이며 순수와는 거리가 멀었던 셈이다. 한쪽으로 가벼이 쏠리지 않고 다름과 차이를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힘과 지혜의 원천이다.
식민지와 분단, 전쟁의 시련을 거치며 옛 흔적을 대부분 잃어버린 채 폐허에서 초단기 압축 숙성해낸 우리 ‘사회’의 나이테가 결코 만족스러우리만큼 굵을 수 없음은 아쉽기 그지없다. 오랜 세월을 두고 가치와 연대, 성찰과 공존의 경험을 착실하게 쌓아올렸어야 할 자리에, ‘순수의 시대’ 따위의 원초적 욕망만이 아직껏 똬리를 틀고 있는 게 우리의 낯부끄러운 현실이다. 특히나 자신과 다른 목소리를 곧장 반국가 테러리스트쯤으로 매도·왜곡하는 박근혜 정부의 퇴행적 상상력은 한마디로 사회 결핍증이 낳은 최악의 병폐이자, 최대 비극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결핍의 상처는 또 다른 강박으로 결코 이겨내지 못하는 법. 제아무리 소셜을 입에 달고 산다 한들 사회라는 뿌리를 대신할 순 없다.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의 하루 일과 중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의 의미도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만하다. 초기 개방형·확장형에서 점차 폐쇄형·관심형으로 무게중심이 옮아간 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외려 단절과 파편화를 촉진할 위험성도 함께 안고 있다. ‘끼리끼리’에 한정된 연결과 공유는 자칫 소통의 폭과 깊이를 더하기는커녕, 소통이라는 환상 아래 그저 익숙하고 편안한 콘텐츠의 유통 속도만 높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셜은 있되 정작 사회는 사라진 빈껍데기 공간.
사회란 본디 이물질이 한데 만나 켜켜이 쌓이는 퇴적의 시공간이다. 사회가 바닥을 단단히 다지며 숨 쉬고 살아 있어야 그 토양 위에서 혁신과 성장, 축적의 열매도 맺기 마련이다.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인류 역사의 가르침이다. 소셜 강박증과 사회 결핍증이 너무도 무덤덤하고 태연하게 공존하는 무대. 소셜 천국, 사회 지옥의 이 땅에서 과연 우리는 미래를 위한 ‘축적의 시간’을 지나고 있기나 하는 걸까. 2015년 끝자락에 드는 의문이다.
최우성 논설위원 morgen@hani.co.kr
최우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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