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정권의 사법정의는 군대의 기합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한 번은 삼류 희극으로.” 공안몰이가 살벌하게 계속되는 가운데 개헌론마저 솔솔 나오는 지금, 아무래도 삼류 희극이 진행되는 것 같기만 하다.
우리말로는 희비극적이라 하여 희극을 비극 앞에 두지만, 유럽 언어에서는 비희극적이라고 비극을 희극의 앞에 둔다. 비희극적이 합당한 것 같다. 비극이 먼저 있어야 희극이 정말 희극적이 될 수가 있겠기에 말이다.
우리 주변에 비희극적 일들을 자주 본다. 정치에 있어서도 그런 너무나도 선명한 경우가 가끔 일어난다.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내가 잘 알고 지내던 송지영씨의 경우도 그의 인생에 그 정치의 비극과 희극이 아주 선명하게 대비되어 교차하고 있었다. 짧게 설명하자면, 언론인이자 소설가인 송씨는 5·16 쿠데타 세력에 의하여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러나 국제펜클럽 등의 진정으로 감형을 거듭하여 8년여의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 후 또다시 쿠데타를 한 신군부에 의하여는 역으로 떠받들어져 국회의원까지 되었다. 비극에 뒤이어 정치적 희극이라 하겠다.
송지영씨의 집안 내력이 특이하다. 평안도의 정감록파 여러 집안들이 난시의 피난처를 찾는다고 경북 영주의 풍기 지방으로 집단이주하였다. 송씨의 집안도 있고, 국회의원을 지낸 박용만씨의 집안도 포함되었다. 송씨는 신학문을 멀리하고 한학에 몰두하여 신동 소리를 들었다. 아주 젊어서 <동아일보>의 기자·논객이 되었다가 동아 폐간 후 중국으로 가서 난징(남경)중앙대학을 다녔다. 그때 우리 임시정부 쪽과 내통했다고 일본 관헌에 구속되어 일본의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복역 중 해방을 맞았다. 소설가 김학철씨와 함께 귀국한다. 김씨는 중국의 태항산에서 항일전을 펴다가 부상을 입고 붙잡혀 형무소살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귀국 후 여러 신문사 간부로 언론 생활을 하는 한편 소설을 썼다. 이범석 장군의 민족청년단(족청)과도 연결이 된다. 족청은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친위대처럼 행동해 오명을 뒤집어썼지만, 당초에는 비교적 괜찮은 정치조직이었다. 그리고 그 세력은 부산정치파동 후 용도 폐기되어 숙청될 때까지 이승만 정권의 주도세력이었다.
송씨는 4·19 때 <조선일보>의 편집국장을 지내고 난 후 5·16이 났을 때 구속되어 사형 언도를 받는 것이다. 본인은 <민족일보>와 전혀 관계가 없고 일본 회사와의 제휴로 텔레비전 사업을 하려 했던 것뿐이라고 했는데, 일본에 있는 <통일일보> 발행인 이영근씨가 민족일보에 관련된 것에 연계되어 이씨와 친했던 송씨도 그 케이스로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과 함께 사형 언도가 내려진 것이다. 조씨나 송씨는 오랜 뒤 민주화 이후 대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되고 뒤늦게 가족들이 보상도 받았다.
여기서 핵심 인물로 나오는 이영근씨의 이야기도 해야겠다. 이씨는 조봉암씨의 주요 참모였다가 진보당 탄압 때 일본에 망명하여 통일일보를 발행했다. 그는 민족일보의 조용수 사장을 얼마간 후원했다. 송지영씨와는 돈독한 친분관계일 뿐이었단다. 이영근씨는 별세했을 때 노태우 정권으로부터 그동안 한국 정부를 위한 공적을 인정받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받았으니 지난날의 일들은 어처구니없었다 하겠다. 하기는 이씨가 따랐던 조봉암씨도 사형 50여년 후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으니 조봉암 이영근 조용수 송지영씨 등이 겹쳐진 정치적 비희극이었다.
송지영씨의 옥중기가 <우수의 일월>이라고 1천 페이지 가까운 책으로 나왔는데, 그날그날의 이야기를 쓴 것이고, 특별히 철학적 사색을 기록한 것은 아니지만, 다 읽고 나면 깊은 여운이 남는다. 감옥생활 동안 그가 읽은 잡지와 책 이야기가 자세히 나와 참고가 되기도 하고, 많은 혁신계 인사들의 옥중생활이 묘사되어 있다.
그는 출옥 후 다행히 조선일보에 복직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 말기인 1979년 문예진흥원장으로 발탁이 된다. 그 연유를 알 수 없다. 다만 내 멋대로의 추측은 정감록파로 피난 온 가족들 중 한 분이 박 대통령의 측근 인사가 된 것이 관련이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신군부의 쿠데타가 나고 그는 더한층의 출세(?)를 하게 된다.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고, 이어서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이 되는 것이다. 전 정권의 사형수가 다음 정권의 국회의원이라! 대단히 비희극적이다.
아직 그런 신상의 변동에 관한 내막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내 나름대로의 추측은 이렇다. 박정희 정권은 친일 경력 때문에 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을 별로 우대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사람들은 모두가 해방 후 세대들이다. 따라서 박 정권과 애써 차별화하기 위해 독립운동세력을 간판으로나마 표면에 내세웠을 것이다. 형식상의 감투이지만 민정당 창당주비위원장인 유석현씨는 유명한 독립투사이다. 그리고 항일의 상징 같은 면암 최익현 선생의 자손인 최창규 교수, 광복군 출신인 조일문 교수 등을 국회에 진출시켰다. 그런 맥락에서 송지영씨도 국회에 뽑혀 들어갔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해석한다.
그렇다고 송지영씨가 그렇게 역사의 피동인물만은 아니다. 언론인 소설가 한학자 서예가이기도 했던 그는 아호가 우인(雨人)인데 그것은 중국의 고전 <수호지>의 영수 급시우 송강에서 한자를 빌린 것 같다. 급시우 송강처럼 통이 크고 덕성이 있다. 한학과 중국에서의 생활은 그를 대륙적으로 만든 것 같다. 마치 장강의 흐름처럼 유유히 산다. 체구는 작지만 통이 매우 크고 매사에 호방하다.
옆에서 본 그는 거의 매일 저녁 술집 순례를 계속한다. 술은 약간만 하고, 봉사하는 여성들에게 팁은 아주 후하다. 8년여 감옥살이에서의 해방감을 실감하려는 것도 같았다. 부산 <국제신보>의 주필로 있다가 5·16 후 혁신계로 몰려 옥살이를 한 소설가 이병주씨는 처음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송지영씨와 한방에 있었단다. 부잣집 아들인 그는 2년 반쯤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지나칠 정도의 사치와 낭비를 하였는데 “출옥하면 최고의 사치를 하며 살겠다고 맹세했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 송지영씨의 그 주머니는? 아무튼 돈 만드는 재주 또한 비상했다.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한학, 서예, 중국 경험 등에 족청의 넓은 인맥으로 우선 고서예 감정과 알선 등으로 적지 않은 용돈을 마련한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감정을 의뢰하러 찾아온다. 그리고 그는 가치가 있는 것일 때는 그의 폭넓은 지인 가운데 합당한 사람에게 전화를 건다. 그래서 용돈의 궁함이 없이 카페 등 술집 순례를 할 뿐만 아니라 가끔은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친구인 고암 이응노 화백 등과 지내고 돌아온다. 이 화백도 이른바 동백림 간첩사건으로 잡혀와 송지영씨와 안양교도소에서 함께 지내기도 한 사이이다. 그렇게 파리 여행을 자주 하는 사이 송씨가 백건우씨와 윤정희씨의 사이를 맺어주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형식상 그렇게 내세웠을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 호방한 그가 사형 언도까지 받고 8년여를 감옥에서 썩었으니…. 그때 또한 요즘 극히 우익적인 논객으로 알려진 류근일씨도 7년여를 함께 감옥생활을 했으니 5·16정권의 사법정의는 군대의 기합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비희극의 양산이다. “역사는 두 번 되풀이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다음 한 번은 삼류 희극으로.” 비유로는 그럴듯하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당면한 역사는 공안몰이가 살벌하게 계속되는 가운데 개헌론마저 솔솔 나오는 등 아무래도 삼류 희극이 진행되는 것 같기만 하다.
남재희 언론인
남재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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