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대의 쓰라린 사연이 담긴 <모내기>는 한국미술사의 영원한 기록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회에 신학철이 출소 후 다시 그린 <모내기> 그림이라도 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시절이 ‘안녕하지 못하여’ 전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내기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엊그제 서울 인사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오픈한 ‘리얼리즘의 복권’전(2월28일까지)에는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구상계열 화가와 민중미술을 주도했던 화가 8명의 대작들이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형상의 원형질을 찾아가는 권순철, 중후한 마티에르로 깊은 서정을 자아내는 오치균, 사진보다 더 정확히 그려내는 고영훈 등이 일상을 그려낸 것도 볼만하지만, 특히 신학철의 한국 근대사, 이종구의 양곡부대에 그린 오지리 사람들, 임옥상의 들불과 아프리카 현대사, 황재형의 사북의 탄광과 광부, 민정기의 스산한 도시 풍경 등 80년대의 ‘문제작’들이 대거 출품되어 깊은 감회를 일으킨다.
그러나 기대했던 신학철의 <모내기>가 없는 것은 큰 아쉬움이고 여전한 아픔으로 남는다. 신학철의 <모내기>는 한국 미술사와 사법사에 영원히 남을 기록이다. 1987년, 그림마당 민에서 열린 제2회 통일미술전에 신학철은 <모내기>라는 작품을 출품하였다. 100호 크기의 대작으로 통일에의 염원을 농사꾼의 모내기에 빗대어 그린 것이다. 아래쪽부터 쟁기로 논을 갈고 모내기를 하며 추수하는 장면으로 이어지고 화면 위쪽은 복사꽃 핀 초가마을과 천둥벌거숭이로 뛰노는 아이들, 그리고 통일의 상징으로 백두산을 그려 넣었다. 내용과 형식 모두가 아주 소박한데다 천도복숭아가 커튼처럼 둘러 있어 거의 ‘이발소그림’ 같은 순박함이 있다. 그 천진성 때문에 강력한 메시지를 담은 그림보다도 오히려 통일에의 열망이 살갑게 다가온다.
민족미술협의회(민미협)는 이 그림을 89년도 달력에 실었는데 이를 이용하여 부채를 만든 인천 지역의 한 재야청년단체를 수사하던 서울시경 대공과에서 느닷없이 신학철 화백의 집을 압수수색하고 신 화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하였다. 경찰은 어이없게도 이 그림이 북한을 찬양한 것으로 보았다. 그림 아래쪽은 남한 사람들이 힘겹게 노동을 하고 있고, 위쪽은 북한 사람들이 푸짐한 밥그릇을 앞에 놓고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그림을 한반도 지형으로 보면 초가집은 평양의 김일성 생가를 암시한다고 주장했다. 어처구니없음을 넘어 이런 식으로 그림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경찰의 대공적 상상력이 경이롭기만 했다. 미술비평엔 인상비평, 양식비평, 재단비평 등이 있는데 가히 ‘공안비평’이라 할 장르가 나타난 것이다.
결국 1989년 8월17일, 신학철 화백은 구속되었다. 민미협에서는 최병모, 박용일, 박원순 세 분을 변호사로 선임하여 이후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였다. 검찰은 사회구성체 논쟁까지 이끌어대며 이 그림을 민족해방노선(NL) 계열의 작품으로 몰아붙였고, 변호사들은 신 화백의 순수성을 변호했다. 특히 최병모 변호사가 이 그림의 서사적 전개방식을 논한 변론은 내가 미술평론가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정도로 치밀했다.
1심 판사는 아예 작품을 법정에 가져다놓고 직접 심리하겠다고 했다. 이리하여 희대의 그림 재판이 열리게 되었다. <모내기> 작품이 법정에 나오는 날 나는 일찍이 가서 신 화백의 가족, 민미협 회원들과 방청석 앞자리에 자리잡고 기다렸다. 얼마 뒤 법원 직원이 작품을 들고 들어와 법정 맨바닥에 놓는데 놀랍게도 천막 개듯이 여러 겹으로 접혀 있는 것이었다.
순간, 민미협 화가들이 일어나 “작품을 이런 식으로 보관하면 어떡하냐”고 항의했다. 그러자 담당자는 압수물 보관소에 있는 그대로 가져왔을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무죄가 되면 역사적인 그림으로 남게 될 것이니 우리가 피브이시(PVC) 파이프를 사오면 그것으로 잘 말아 보관해 달라고 부탁하고 함께 조용히 앉아서 재판을 기다렸다.
이윽고 판사가 들어와 개정을 선언하고는 법정 정리에게 양손으로 작품을 높이 펼쳐 쳐들게 하고 직접 피고인 신 화백에게 물었다.
“이 작품이 피고가 그린 <모내기> 그림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그림에 있는 것을 하나씩 묻겠습니다. 맨 아래쪽에 그려진 건 무엇입니까?”
“모내기를 하기 위해 써레질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통일에 방해되는 것을 제거하는 거지요. 무얼 그렸습니까?”
“철조망, 미사일, 탱크, 코카콜라, 람보… 그런 겁니다.”
“람보가 왜 통일에 방해가 됩니까?”
“외세는 통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그 위에 있는 장면이 모내기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모를 찌는 겁니다.”
“모를 찌다니요?”
“모를 쪄내야(떠내야) 모를 내지요.”
이처럼 고지식할 정도로 순박한 신학철 화백이다. 이에 방청석이 떠나가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판사도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 위는 무슨 장면입니까?”
“추수하면서 참을 먹는 겁니다.”
“그 위에 그린 초가집은 김일성 생가를 그린 겁니까?”
“난, 그런 생각 한 적 없습니다. 무릉도원 같은 복사꽃 핀 시골 마을을 그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판사는 잠시 그림을 꼼꼼히 살피더니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면 화면 아래쪽, 소 뒤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굽니까?”
“아, 그분요. 그분은 우리 6촌 형님입니다.”
방청석은 또 한 번 떠나가라 웃음이 터졌다. 이 순박한 농사꾼 같은 화가에게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있을 수 없음이 그렇게 증명되었다. 신학철은 구속 3개월 뒤 보석으로 풀려났고, 1심 재판에서 무죄, 2심 재판에서도 무죄가 선고되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10년 뒤인 1998년 대법원 상고심은 원심을 파기하고 서울지법 합의부로 되돌려보냈다. 결국 신학철은 1999년 11월, 징역 10월, 선고유예 2년 형이 확정되었다. 그리하여 신학철의 <모내기> 그림은 사건번호가 쓰여 있는 누런 봉다리 속에 첩첩이 포개진 상태로 검찰청 압수물 보관창고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에 예술인과 시민단체의 반발이 빗발쳤다. 유엔 인권위원회는 2000년 4월 한국 정부에 신학철 <모내기>에 대한 판결은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19조,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작가를 위한 구제조처와 피해 보상을 하라고 결의했다. 참여정부 시절 이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관시키는 방법을 여러모로 강구해 보았다. 그러나 사법부의 최종 판결은 움직일 수 없는 일이어서 불가하다는 회답만 되돌아왔다.
이처럼 한 시대의 쓰라린 사연이 담긴 신학철의 <모내기>는 한국 미술사의 영원한 기록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이번 전시회에 신학철이 출소 후 다시 그린 <모내기> 그림이라도 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시절이 ‘안녕하지 못하여’ 전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전시장에 신학철이 ‘6촌 형님’을 그린 <마지막 농부>라는 작품이 있어 발을 멈추고 보고 있자니 ‘모내기 사건’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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