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명쾌한 구호를 내걸고, 매스미디어를 통해 대중에게 직접 호소한다. 반대 세력을 악역으로 세우고, 자신은 서민의 편에서 싸우고 있는 것처럼 하여 서민의 마음을 잡는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일본을 이끈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극장형 정치’ 수법이다. 그는 ‘개혁’이란 구호 아래 ‘관료’를 악으로 몰아세우며 정국을 이끌어갔다. 우정사업 민영화 과정이 볼만했다. 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되자,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인기 아나운서와 미모의 여성 관료, 이름난 요리 연구가를 ‘자객’으로 공천해 반대파를 제압했다. 집권 후반기에도 지지율이 50%대였다. 그가 ‘신자유주의 개혁’으로 일본 사회를 두 동강 냈다는 비판을 받은 것은 물러난 뒤의 일이다. 3년 뒤 54년 만에 자민당 정권이 붕괴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도 ‘극장형 정치’를 닮았다. 암덩어리 규제, 통일 대박, 4대 개혁 같은 단순명쾌한 구호를 내걸고, ‘국민을 생각하는 대통령’과 ‘비생산적인 국회’(발목 잡는 야당)의 대립 구도로 정국을 끌어간다. 재미없어질 만하면 이야기를 확 바꾸는 연출도 돋보인다. ‘내부자 언론’들이 백 퍼센트 공감의 평론을 쉼 없이 써주니, 흥행이 아무리 못해도 기본은 한다.
박 대통령은 주인공을 맡기에 손색없는 스펙을 지녔다. ‘대통령 가문’에서 태어나고, 국무위원들을 앞에 두고 책상을 열 번이나 내리칠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다. 테러방지법 처리를 늦추기 위해 야당 의원들이 8일째 밤낮없이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도 한 치의 타협도 하지 않는 신념에 찬 사람이다. 공포에 민감한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한다. 낙하산 인사로 방송을 장악하고, 여당 원내대표를 호통 한마디로 밀어내고,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하고, 개성공단을 문 닫고, 테러방지법으로 국정원에 힘을 실어줘도 지지율이 좀체 빠지지 않는다. 필리버스터로 반대파들이 모이면, 박 대통령 지지자들도 결속한다.
‘박근혜 극장’ 밖의 광경은 처참하다. 일자리의 질은 나빠져 가고, 가계 소득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빚은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중국 특수로 한때 잘나가던 대기업들도 숨이 턱에 찬다. 나라 경제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모습이 곳곳에 보인다. 그럼에도 왜 많은 이들이 극장 안에 머물러 있을까? 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극에 몰두하는 동안엔 적어도 시름은 잊을 수 있지 않겠는가.
통계청 가계조사의 평균소비성향(가처분소득에서 소비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을 보면, 사람들이 느끼는 앞날에 대한 ‘불안’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는 76~77대였는데 이명박 정부 마지막 해인 2012년 들어 74.1로 떨어지고,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3년 연속 떨어지며 지난해엔 71.9까지 추락했다. 사람들은 점점 지갑을 움켜쥐고, 그것이 경제를 악순환에 빠뜨리고 있다.
야당이 “박근혜 정부가 경제를 잘못 운영한 탓”이라고 백번 외쳐봐야 귀 기울이는 이가 별로 없다. 야당의 해법에 공감하고 함께 목소리를 내주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해보려는데 발목만 잡는다’는 역공에 맥을 못 춘다. ‘경제에 무능한 야당’이란 고정관념은 쉽게 넘어서기 어려운 벽이다. 필리버스터에서 테러방지법에 대해 했던 것처럼, 한국 경제의 앞날과 민생현안에 대해서도 정교한 분석과 대안을 과연 제시할 수 있는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야당이 그 일에 에너지를 쏟지 않으면 집권당이 되기는 어렵다. 그 단초를 보여줄 수 있을지, 총선 공천을 주목한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정남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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