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별것도 아닌 영화를 편협하게 받아들이는 바람에 부산국제영화제가 이렇게 되고, 세계 영화계가 떠들썩해지고….” 지난 2월25일 부산시청 회의실에서 연 부산국제영화제 총회 자리에서 서병수 부산시장이 나간 뒤 어수선한 회의실에 남아 임권택 감독은 이렇게 한탄했다. 별것도 아닌 영화란 <다이빙벨>을 말한다. 2014년 부산시가 영화제에 <다이빙벨> 상영 중단을 요청했다가 시작된 부산시와 영화제의 갈등은 결국 이날 부산시가 이용관 집행위원장 해촉을 강행하는 파국을 맞았다. 그런데 상영 중단을 요청할 당시는 서 시장이 아직 <다이빙벨>을 보지도 못했을 때였다고 한다. 시장이 이 영화를 “영화제의 정치적 중립을 훼손하는 작품”으로 위중하게 취급했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이상한 일은 계속된다. 지난 2일 서 시장은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에는 새로 위촉된 조직위 자문위원들의 ‘자격’을 문제삼고 나섰다. 지난 총회에서 부산시가 이용관 집행위원장 연임을 거부했고 서 시장이 “조직위원장에서 물러나고 영화제를 민간에 이양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정관 개정이 시급해졌다. 그런데 조직위원 106명이 정관 개정을 위한 임시총회 소집을 요구하자 서 시장이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부산국제영화제를 좌지우지한다”며 “임시총회 요구는 대부분 이번에 부당하게 위촉된 자문위원들에 의한 것이기에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서 시장이 말한 자격도 없는 자문위원 중엔 <암살>의 최동훈 감독, <베테랑> 류승완 감독, <올드보이> 박찬욱 감독, 영화배우 유지태, 하정우 등이 포함됐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위기를 지켜보면 정부와 부산시의 영화 관련 활동은 주로 특정인들을 배제하고 내치기 위한 일들에 집중됐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지 않아도, 자문위원들의 경력을 검토하지 않아도, 누군 안 되고 어떤 주제는 안 된다는 식의 기준이 서 있다. 한마디로 편가르기다.
2013년 런던한국영화제는 개막작을 <관상>으로 정했다가 <숨바꼭질>로 바꾼 일이 있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갈등을 겪으면서 뒤늦게 그 이유가 알려졌는데, <관상> 제작사가 영화 수익의 절반을 아름다운재단에 기부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위에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영화 <다이빙벨>을 상영한 2014년 영화제 폐막 직후 감사원은 부산시를 통해 부산국제영화제 회계자료를 요청했다. 영화 <변호인> 제작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받았던 일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영화인, 제작사, 배급사가 어느 편인지 분류하고 그들을 배제하기 위해선 영화제를 흔드는 것도 감수하는 사람들이 어딘가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쳤을 때 하원 반미활동조사위원회는 진보적인 영화계 인사 212명을 두고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라는 것을 작성했다. 미국 영화협회 회장이 “알려지거나 스스로 밝힌 어떤 공산주의자도 고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하면서 블랙리스트에 오른 영화배우나 제작 관련 기술자들은 모조리 영화업계에서 쫓겨났다. 이때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오른 상당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자신의 이념을 검증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이었다.
한국 영화 블랙리스트는 그들이 만드는 영화가 영화계나 상영관에서 순탄하게 관객을 만나지 못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그 결과 정부 입맛에 맞지 않는 영화나 영화인들이 배척받는 지금 상황이 좀 더 지속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 일본 영화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영화가 나빠지는 걸 구경한 다음에는 세상이 나빠지는 걸 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남은주 대중문화팀 기자 mifoco@hani.co.kr
남은주 대중문화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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