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고독 자체가 고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때 ‘고문’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로부터 분리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생물학적 차원에서도 그러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일자리를 잃어, 노숙인으로 전락하여, 쪽방에 거주하게 되어, 독거노인의 처지에 빠져, 경쟁사회로부터 배제된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불평등에다 흙수저로서 자포자기하여 사실상 분리되고 배제된 사람들 역시 ‘사회적 고문’을 받고 있다.
최근 인권과 관련해 주목할 만한 소식이 있었다. 미국 루이지애나주에서 거의 일흔에 가까운 흑인 재소자가 석방되었다. 강도죄로 형을 살다 교도소 간수를 죽였다는 이유로 추가 종신형을 받아 복역하던 앨버트 우드폭스라는 사람이다. 무려 43년 동안 운동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23시간을 독방에 갇혀 지냈던 우드폭스는 흑인해방 단체인 블랙팬서에 가담한 탓에 살인 누명을 썼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여생을 독방 구금 반대운동에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어떻게 그 긴 세월을 버텼을까. 살아남기로 맹세하고 신문, 잡지를 통해 바깥세상 돌아가는 형편을 매일 공부하면서 악착같이 정신줄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사법 처벌을 받아 옥에 갇힌다. 교도소 안에서 규정을 위반하면 징벌을 받는다. 징벌은 사법상 처벌이 아니고 행정상 불이익 처분이다. 징벌 중 제일 심한 벌인 독방 구금을 금치(禁置) 처분이라 한다. 문제는 금치 처분이 심각한 인권 유린이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금치가 공론화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이 범죄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겐 일반인이나 교정 담당자나 흔히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죄짓고 갇혀 있는 주제에 또 사고를 치면 독방에 갇히는 게 당연하다.’ 과연 그럴까. 한 사회 내에서 가장 경멸받고 망각된 사람의 문제를 인권 문제로 볼 줄 아느냐 여부가 당신의 인권 감수성을 측정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인간을 일반 사회로부터 분리하여 옥살이 시키는 것을 1차 격리라 한다면, 교도소 내에서 다른 수감자들과 분리하여 독방에 가두는 것은 2차 격리라 할 수 있다. 2차 격리자는 감옥 안의 감옥 생활, 정말 세상에서 완전히 소외된 사람이다. 학계에서는 1950년대부터 이런 이들에게 나타나는 변화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맥길대학에서 자원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방 구금으로 비롯되는 변화를 측정한 적이 있었다. 원래 6주 예정으로 시작한 실험이었지만 며칠 만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피실험자들의 정신상태가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미국 위스콘신대학의 심리학자 해리 할로가 실험용 붉은털원숭이에게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그는 인도에서 수입하던 원숭이 가격이 올라 실험실 내에서 직접 원숭이를 키우기로 하고, 위생과 영양이 완벽하게 제공되는 공간에다 새끼 원숭이를 한 마리씩 넣어 길렀다. 이들의 신체적 발육상태는 수입한 원숭이보다 월등하게 좋았다. 그러나 격리된 채 자란 원숭이들은 하루 종일 멍하게 우리 속을 맴돌며 이상하게 행동했고 자기 몸에 상처를 내기 일쑤였다. 특히 나중에 다른 원숭이들과 섞어 놓아도 함께 어울릴 줄 모르는 외톨이가 되곤 했으며 사망률도 아주 높았다. 할로는 영장류가 오랜 기간 격리되면 사회성을 영구히 상실하게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중동과 같은 분쟁지역에서 인질로 잡혀 몇 년씩 고립된 상태에서 갇혀 있었거나, 전쟁포로로서 독방 구금을 당했던 병사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말로 표현 못할 가혹행위를 당한 사람이 많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육체적 고통만큼이나 독방에서의 고립이 힘들었다고 증언했다. 독방에 감금되었던 사람들은 환청, 환시, 공황장애, 폐소공포, 인지혼란, 망상, 기억상실, 무기력, 우울, 신경과민, 자해, 만성피로, 집중 장애, 맹목적 적개심을 겪었다. 자살률도 높았다. 장기 독방 구금자들은 태아와 같은 자세로 웅크린 채 하루 종일 비몽사몽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증상은 전문 의학자들뿐만 아니라 수인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교도관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심리적·정신적 장애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랜 독방 구금자들은 심한 뇌진탕을 당한 환자와 비슷한 수준으로 뇌파 기능이 저하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독방 구금이 몸과 마음을 함께 파괴한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고독 자체가 고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때 ‘고문’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로부터 분리되면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된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생물학적 차원에서도 그러하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고명섭이 집필하는 <이희호 평전>에 이런 일화가 나온다. 신군부에 의해 청주교도소에 갇힌 김대중은 완전한 격리 상태로 수감되어 있었다. 1981년 2월 김대중은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여기 온 지 불과 20일이고 가족 면회한 지 10일인데 이 모든 것이 반년이나 된 것 같습니다. 그토록 세월이 지루하고 고독이 무섭다는 것을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체험으로 느끼게 됩니다.” 그해 11월 가족을 면회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 “잠을 자다가도 숨이 턱 막히면 발광할 지경이 되어서 일어나 기도함으로써 극복했습니다.” ‘발광’, 나는 이 이상으로 독방 구금을 전율할 만큼 정확히 묘사한 표현을 알지 못한다. 민주화 이후에도 교도소 상태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었다. 조영래 변호사의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를 보면 1989년 원주교도소에 갇힌 대학생들이 서적 불허 조치에 항의하자 다섯 시간 동안 재갈을 물리고 두 달간 징벌방에 가두는가 하면 면회, 서신, 운동 등을 일체 금지시켰다고 한다.
현재 형집행법에는 금치 기간을 30일 이내로 하고, 징벌위원회에 외부위원을 3인 이상 포함시키며, 규율위반에 대해 징벌 종류를 다양화하여 총 14가지 징벌을 내릴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교도소 내에서 징벌은 금치 처분이 주를 이룬다. 김옥기·송문호는 2014년 발표한 논문에서 현행 징벌제도가 금치에 편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혔다. 2008~2012년 사이의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교도소 수용 인원 중 약 30퍼센트가 징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징벌 중 금치 처분이 압도적 비율을 차지했다. 2012년의 경우 전체 징벌 1만3702건 중 90퍼센트가 금치 처분이었다. 지시 불이행, 수용자 폭행, 생활방해 등 징벌 사유에 걸리면 거의 무조건 징벌 독방에 구금되었던 것이다.
위의 연구에는 한 교도소에서 5주간 금치 일변도가 아닌 징벌의 다양화를 시도했던 실험이 소개되어 있다. 가장 빈번한 징벌 사유인 입실 거부의 경우, 금치 처분이 아닌 텔레비전 시청 금지, 작업장려금 삭감, 접견 제한 등의 징벌도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왜 교정시설에선 금치 처분에만 매달리는 것일까. 현장 관계자들이나 징벌위원들이 천편일률 관행적으로 금치 처분만을 징벌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외부로부터의 상시적 통제장치가 필요하다. 조직 내 부적응을 이유로 금치를 시행하면 오히려 더욱 심각한 조직 부적응자를 양산하게 되므로 금치 처분은 어처구니없이 역설적인 처벌인 셈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2011년 유엔 고문 특별보고관인 후안 멘데스는 하루 22시간 이상 홀로 가둬 두는 독방 구금이 범죄자의 교정에 반하는 고문 또는 가혹행위라는 보고서를 제출한 바 있다. 사회적 격리가 ‘불가역적 정신장애’를 초래하므로 15일 이상의 금치 처분, 특히 미성년자와 정신질환자의 금치를 무조건 폐지해야 한다고 유엔 총회에 보고했던 것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올해 초 행정명령을 발동해 전국의 모든 연방 교정시설에서 미성년자의 금치 처분을 금지시켰다.
여기에 더해 사회학적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교도소 내의 독방 구금이 인권 유린이라면, 일반 사회 내에서 강요된 고립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일자리를 잃어, 노숙인으로 전락하여, 쪽방에 거주하게 되어, 독거노인의 처지에 빠져, 경쟁사회로부터 배제된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불평등에다 흙수저로서 자포자기하여 사실상 분리되고 배제된 사람들 역시 ‘사회적 고문’을 받고 있다고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으로부터 사회적 탯줄을 제거하면 그에겐 고통을 느끼는 육신만 남게 된다. 모든 인간은 고문 없는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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