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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서울의 봄은 어떻게 오는가 / 유홍준

등록 2016-03-10 20:43수정 2016-03-10 21:08

올봄엔 큰 걱정이 하나 생겼다. 봄이 절정에 달하는 4월13일엔 총선이 있다. 너나없이 봄꽃에 정신 팔려 행여 투표도 하지 않고 봄나들이 나갈까 걱정이다. 선거가 끝나고 세상 판도가 우려한 대로 망그러진다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한숨짓지나 않을까 불안하다.
봄이 왔다. 새봄을 맞으며 추사 김정희는 “봄이 짙어가니 이슬이 많아지고 땅이 풀리니 풀이 돋아난다(春濃露重 地暖草生)”며 향기 은은한 난초를 그렸지만 나는 봄꽃이 만발한 유적지를 생각하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강진 백련사의 동백꽃, 선암사 무우전의 매화, 부석사 진입로의 사과꽃, 한라산 영실의 진달래, 꽃의 향연이 벌어지는 서울의 5대 궁궐…. 전 국토를 거대한 정원으로 삼으며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랑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봄의 전령 화신(花信)은 남쪽으로부터 올라온다. 지구 온난화로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봄꽃의 개화에는 꽃차례가 있다. 2월 말이면 남쪽에선 동백이 피고 매화가 꽃망울을 맺었다는 소식이 올라오기 시작하여 3월 하순이 되면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만 바쁘던 텔레비전 뉴스도 연일 꽃소식을 전한다. 올해는 개화 시기가 평년보다 이틀 정도 빠를 것이란다. 전남 광양을 비롯하여 남쪽 지방 10여 곳의 매화 축제는 이달 18일부터, 진해 군항제 벚꽃 축제는 다음달 1일부터로 예고되었고 서울은 개나리가 이달 27일, 진달래는 28일, 벚꽃은 다음달 7일께라고 한다.

서울의 봄꽃은 인왕산 북악산에서 생강나무와 산수유가 소리 소문 없이 노란 꽃을 피워내고 주택가에서는 목련이 하얀 꽃망울을 터트리며 시작된다. 서울에 목련이 많이 심어진 것은 70년대 강남의 신흥주택가였다. 지금도 영동 뒷골목의 단독주택 담장 위로는 그때 심은 목련이 품 넓게 자라 탐스러운 꽃을 피우고 있다.

그러나 봄꽃의 상징은 역시 개나리와 진달래다. 비록 예전 같지는 않지만 강북의 묵은 동네 돌축대 아래로는 길게 늘어진 개나리가 한껏 맵시를 뽐내고 있고 연륜 있는 초등학교 교정에선 여전히 밝게 핀 개나리꽃이 새 학기 학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때가 되면 남산과 북한산에는 진달래가 피면서 봄의 합창이 시작된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유독 정겨운 것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해맑은 빛으로 옹기종기 무리지어 피워낸 그 청순한 아름다움 때문일 것이다. 순정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서울의 진달래는 아무래도 북한산 진달래능선이 제일이겠지만 옛날 자하문 밖에는 진달래가 아주 많았다. 평창동 구기동 산자락을 주택들이 차지한 뒤로는 솔밭 그늘에서 해맑게 피어나는 진달래는 볼 수 없게 되었지만 어쩌다 멀리 바위틈에서 어렵사리 피어난 진달래를 보게 되면 그 조신한 아름다움에 놀라게 된다. 홍지문 한쪽 높은 벼랑을 동네 아이들은 코끼리 바위라고 부르는데 그 바위 틈새에서 피어난 연분홍 진달래꽃은 어찌 보면 수줍은 듯하고, 어찌 보면 애잔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를 보고도 감탄을 발하지 않는다면 그는 한국인의 정서, 내지는 인간의 서정을 가졌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무렵 서울 근교로 봄맞이 고적답사를 떠나면 차창 밖으로 비치는 야산은 그야말로 진달래 산천으로 되어 있다. 경기도 광주 도마리 번천리 금사리 분원리 등 조선시대 도요지는 가마 불을 때기 위한 극심한 벌목으로 산들이 심하게 산성화된 지 오래되어 진달래가 유난히 붉게 물든다. 더 멀리 떠나 경주 남산으로 가게 되면 마애불과 진달래가 어우러지는 모습이 거의 환상적이다. 이것이 국토의 표정이고 여기까지가 봄의 서막이다.

그러다 4월로 들어서면 전 국토에 봄꽃의 향연이 벌어진다. 복숭아꽃, 살구꽃, 자두꽃, 배꽃, 사과꽃, 모든 유실수들이 다투듯 희고 붉게 피어나며 찔레꽃 넝쿨까지 뒤엉키면서 전국의 온 산이 연분홍 파스텔 톤으로 물든다. 올해로 101살을 맞이하신 내 친구 임옥상 화백의 어머니가 어느 봄날 밭에서 일하다 앞산을 바라보며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 소리를 나는 잊지 못한다. “뭔 꽃이 저렇게 난리도 아니게 지랄같이 피어댄데여. 손이 열 개라도 모자라는데 우쩌란 말이여.”

이때 서울의 남산은 벚꽃이 솜사탕 뭉치처럼 피어오른다. 신작로 시절부터 심은 전국의 가로수 벛꽃들도 봄의 합창을 노래한다. 벚꽃은 일본 국화라고 해서 많이 기피하기도 하지만 꽃이 아름다운 걸 어쩔 거냐는 듯 벚꽃 축제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서울 여의도 윤중로는 인파로 넘친다. 강남에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설 때 심은 벚나무는 벌써 수령이 50년을 넘어 장관을 이루는 곳이 많다. 내가 신혼 시절에 살았던 잠실시영아파트의 벚나무 숲은 제법한 규모였는데 지금은 이름도 바뀌고 이를 모두 베어낸 것이 억울하기만 하다.

그런 봄날 꽃들의 향연에서 서울은 알게 모르게 개나리가 날로 장하게 번성한 것을 서울 사람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겠다. 개나리는 원체 생명력이 강하고 잘 번식하여 토목공사 뒤끝에 많이 심었다. 성수대교 건너편 응봉산 한강변 자락은 온통 개나리 동산으로 조성되어 엄청스럽게 피어난다.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 길가도 개나리 차지가 되었다. 올림픽대로 쪽은 개나리 줄기를 가위질로 동그랗게 공글려서 마치 일본 정원을 연상케 하는 인공미가 강요되고 있지만 강변북로 개나리는 생긴 대로 흐드러지게 피며 천연스러운 멋으로 다가온다. 남산1호터널, 3호터널, 금호터널, 옥수터널 등 산을 뚫은 터널 머리 위에 심어놓은 개나리들이 이제 와서는 한강을 넘나들며 출퇴근하는 서울 사람들에게 봄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개나리는 역시 천변에 있을 때가 제멋이다. 자하문 밖 세검정 앞을 지나 홍지문을 거쳐 흘러내리는 홍제천이 남가좌동을 지날 때는 천변에 모래가 많이 쓸려 내려와 모래내라고 부르고 가재가 많던 개울가를 가재울이라고 부르는데 이 모래내 가재울 천변의 개나리는 정말로 장관이다. 천변뿐만 아니라 그랜드힐튼호텔 쪽 길게 뻗은 돌축대 아래로 개나리가 수양버들처럼 늘어져 봄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모습은 꿈결 속을 지나는 것만 같다.

나는 오늘도 강남의 학동 수졸당에서 남가좌동 명지대 가재울미술사연구소를 오간다. 귀가할 때는 시내를 거쳐 돌아오지만 출근할 때는 성수대교 지나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홍제동에서 내려와 모래내길로 해서 학교에 간다. 그래서 봄이 오면 성수대교를 건너면서 응봉산의 장대한 개나리 꽃동산을 보며 가슴을 적시고, 홍지문터널을 빠져나오면 멀리 탕춘대성을 타고 오르는 개나리가 나를 맞이하고, 모래내 천변 개나리꽃 행렬을 따라가게 된다. 나에게 서울의 봄은 이렇게 개나리와 함께 찾아온다.

그러나 봄꽃이 모든 이에게 기꺼운 것만은 아님을 알고 있다. 나처럼 하릴없이 꽃구경 다니는 인생은 이제야 저제야 꽃피는 날짜를 손꼽아 기다리지만 인간으로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자연인지라 축제의 좌판을 벌여 한 해 벌이를 해야 하는 이들에게 봄꽃의 기다림은 차라리 근심이기만 하다. 혹시나 작년처럼 개화가 일찍 시작되어 군항제가 열리기 전에 벚꽃이 다 피어버리지나 않을까 걱정이고, 그러께처럼 매화축제 날짜에 꽃망울도 터지지 않을까 애를 태우게 한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그런데 올봄엔 내게도 큰 걱정이 하나 생겼다. 봄이 절정에 달하는 4월13일엔 총선이 있다. 너나없이 봄꽃에 정신 팔려 행여 투표도 하지 않고 봄나들이 나갈까 걱정이다. 그리고 선거가 끝나고 세상 판도가 우려한 대로 망그러진다면 봄이 왔어도 봄 같지 않다며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한숨짓지나 않을까 불안하다. 그리하여 옥상이 어머니 말마따나 “이게 뭔 난리 아닌 난리냐”고 외쳐야 한다면 어쩔 거나.

그래서 올해는 서울의 봄이 진짜 ‘서울의 봄’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속이 타들어갈 뿐, 꽃이 피든 말든 안중에 없다. 내 평생 이처럼 불안한 봄을 맞이하기는 처음인 것 같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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