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이 총선 결과가 드러난 뒤이다. 결과를 앞에 놓고 독자들은 이 시를 읽으며 새삼 봄의 혁명적 의미를 되새겨야 할지 모른다.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사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사월은 일어서는 달.”(신동엽, ‘사월은 갈아엎는 달’ 마지막 연)
뿌연 기운이 며칠째 하늘을 덮어도 꽃들은 아랑곳없이 피어나 봄 세상이 왔음을 알린다. 지난 주말 몇몇 동료 문인과 함께 도종환 선거유세 응원을 가는 자동차 안에서 옆에 앉은 여자 후배가 창밖을 내다보며 묻는다. 나이가 들면 계절의 변화 같은 덴 무심해지겠지요? 대지를 가득 채운 봄기운이 자기에게 전해지듯 내게도 전해지느냐는 물음이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젊은 날 나도 70대 노인을 보면 그런 생각을 했었다고. 자연과 인사에 대해 아무런 정감도 없을 것 같은 뻣뻣한 얼굴로 무슨 느낌이라는 걸 갖겠느냐고. 그런데 내가 막상 그 나이가 돼 보니 전혀 그렇지 않음을 수시로 실감한다. 세월과 더불어 표정의 싱싱함이 퇴색하는 건 불가항력이지만 계절과 기후에는 오히려 더 민감해지는 것이다. 저항력이 약해지니 외계의 변화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할 신체적 필요가 생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당연한 얘기지만, 자연의 변화는 인간의 심신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거뭇하게 다 죽은 것 같던 나무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연초록 움에 눈이 가면 억눌려 있던 환희감이 절로 솟는다. 산책길 옆 아무나 밟고 다니던 땅에서 샛노란 꽃잎이 얼굴을 내미는 걸 봐도 갑자기 생의 의욕이 살아난다. 한마디로 봄의 도래는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며 생명의 승리를 향한 진군이다. 재생과 해방의 메시지를 품은 기독교의 부활절과 유대교의 유월절이 이 무렵인 것은 그런 점에서 너무도 자연스럽다. 종교와는 담쌓고 지내던 시인도 군사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던 시절 이렇게 노래한 바 있었다. “그대는 겨울을/ 겨울답게 살아 보았는가/ 그대는 봄다운/ 봄을 맞이하여 보았는가/ 겨울은 어떻게 피를 흘리고/ 동토(凍土)를 녹이던가/ 봄은 어떻게 폐허에서/ 꽃을 키우던가”(김남주, ‘잿더미’ 부분)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면, 봄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과연 혁명의 계절이라 할 만하다. 우선, 왕조의 부패와 학정에 분노한 농민들이 동학교도와 합세하여 일어났던 1894년의 4월(음력)을 상기할 수 있다. 그해 4월이 경과하는 동안 전봉준은 동학 접주들과 함께 운집한 농민들을 지휘하여 일종의 혁명군을 조직했고 보국안민의 내용을 담은 창의문을 발표함으로써 절망적 현실을 타개할 보편적 이념을 제시했다. 한때 승승장구하던 동학군은 막강한 무력을 지닌 일본군의 개입으로 결국 패배하고 말았으니, 바로 조선 식민지화의 길이었다.
깨지고 흩어졌던 민중의 에너지가 사반세기의 축적을 거쳐 다시 새롭게 폭발한 것이 3·1운동이다. 지금 나 자신도 3·1운동이라 부르고 있지만, 어떤 분들의 주장대로 ‘3·1혁명’이 더 적절한 명명일지 모르겠다. 운동이라기보다 혁명인 까닭은 무엇인가. 1919년 봄의 봉기는 단지 일제의 통치에 대항해 자주와 독립을 외친 반외세 운동이 아니라 미래의 국가체제를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변혁하자는 시민적 혁명이었다. 당시의 객관적 조건에서 그 귀결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성립이었음은 알려진 대로이다. 따라서 1919년 4월11일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제1조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한 것은 실로 역사적인 결정이었다.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창비, 2012)이라는 책의 저자 서희경에 의하면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수립은 적어도 이념의 지평에서는 ‘근대 시민혁명과 민족혁명을 겸하는’ 일대 역사적 전환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삼일운동은 민족 내부의 모든 정치적·사회적 차이를 뛰어넘어 참가자들 사이의 수평적인 일체감을 가져왔고, 그것이 국민의식을 고취했다. 그러나 삼일운동은 민족 외부와의 투쟁이었던 것만이 아니라 민족 내부의 투쟁이기도 했다. 반제국주의 운동이자 반군주제 운동이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 환국 때까지 모두 다섯 차례 개헌을 했다고 한다. 서희경의 연구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은 조소앙(1887~1958)이다. 그는 권력과 재산 및 교육의 평등이라는 삼균주의의 주창자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가 자신의 이념을 헌법 조항에 넣은 목적이 계급혁명을 예방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아이러니다. 이 임시정부 헌법은 1948년의 대한민국 헌법에서도 기본 토대가 되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국가체제의 수준에서는 한국 역사는 3·1운동 이전과 이후로, 즉 왕조국가 시대와 민주공화국 시대로 나누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중요한 사실은 1920년대 소위 ‘문화정치’ 아래서 전개된 다양한 사회·문화운동의 성과들이 일제 식민지정책의 시혜가 아니라 3·1운동에 의해 쟁취한 일종의 민족적 전리품이었다는 점이다.
헌법에 명기된 자유와 민주주의의 정신은 해방 후 대한민국 역사에서 권력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훼손되고 거부되었다. 이에 대한 두 번의 거대한 민중적 폭발. 하나는 1960년 4·19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1987년 6월 항쟁이다. 언뜻 보기에 4·19는 혁명으로서의 성격이 매우 제한적이다. 부정선거 규탄부터 이승만 정권 퇴진까지 구호는 상승했으나, 운동의 주체가 주로 대학생이고 운동방식이 거리시위에 그친 데서 나타나듯 4·19 자체는 정치적으로 소박하고 자연발생적인 한계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의 하야도 미국의 압력에 따른 것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3월15일부터 4월26일까지의 경과만 놓고 본다면 확실히 4·19는 정권의 붕괴만을 가져온 단순한 사건에 불과하다. 그러나 1960년대의 심층을 들여다보면 분단체제하의 경직된 반공독재를 해체하려는 민중적 염원과 보수반동체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 간에 치열한 투쟁이 진행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혁명의 성공과 좌절이 부딪치는 싸움이었다. 1961년의 5·16 세력도 초기에는 4·19의 계승을 자처했는데, 그들의 그런 공언이 실상 빈말은 아니었다. 당시 나 자신으로 말하면 시골 출신 대학생으로 정치에는 거의 백지였고 게다가 알바에 쫓겨 시국문제에는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4·19 이후 캠퍼스에서 흡수한 자유의 공기는 평생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 지금도 느끼고 있으며, 조금 일반화해서 말하면 1960~70년대 민족문학운동이 거둔 업적은 4·19혁명의 성취 위에서 비로소 가능성이 열린 것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1972년부터 1987년까지 이 나라에서 통용된 헌법의 내용은 거칠게 말해서 대한민국 독립투쟁과 건국운동의 전통에 대한 부정이고 유린이었다. 따라서 소위 유신체제 선포부터 6월 항쟁 승리까지의 집권자들은 대한민국 헌정질서의 파괴자이고 극단적으로 말하면 대한민국 체제의 반역자였다. 1970~80년대의 치열한 민주화투쟁은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탄생 과정에서 배태된 본연의 자유민주주의로 돌아가려는 운동이었다. 그런데 ‘87년 헌법’으로부터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오늘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다시 만신창이가 되었고 국가라는 것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지 의심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은 총선이 한창 진행 중이지만 활자화되었을 때는 결과가 드러난 뒤이다. 결과를 앞에 놓고 독자들은 꼭 50년 전인 1966년 4월3일 <조선일보>에 발표된 다음 시를 읽으며 새삼 봄의 혁명적 의미를 되새겨야 할지 모른다.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사월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사월은 일어서는 달.”(신동엽, ‘사월은 갈아엎는 달’ 마지막 연)
염무웅 문학평론가
염무웅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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