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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특별기고] 신발 신고 발바닥 긁은 선거전 / 남재희

등록 2016-04-21 19:38

우리 정치의 진일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진보정당의 원내교섭단체 구성이다. 진보정당이 원내교섭단체로서의 발언권을 갖고 끊임없이 개혁과제를 제기해야만 한다. 이미 유권자의 기반은 갖추어져 있다. 다만 제도가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독일 정도로 절반을 비례대표로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알맞을 것이라고 본다.
그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보수언론들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번의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 의석에 미달하는 패배를 하고, 야당들이 약진한 게 어리둥절하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이번에 진행된 선거전에 관한 느낌은 마치 ‘신발 신고 발바닥 긁는’ 것만 같았다.

정당들은 중간층·부동층을 흡수하기 위해 선거 때 얼마간 중도화된 공약을 내걸고 선전을 한다고 한다. 외국의 예를 보아도 그렇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그 중도화가 도를 넘어 너무 심했다고 본다. 이슈만 놓고 볼 때는 맹물 같은 선거전이었다. 분단국가인 우리의 경우 매우 중대한 남북문제나 미·중 등 국제관계에 관한 이슈가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문제도 철저하게 논의되어야 마땅했다. 남북 간의 관계 악화 방지나 그 개선책도 중요 쟁점으로 논의되어야 마땅했다. 선거전은 마치 남북 간이 태평시대에 있는 것처럼 진행되었다. 더불어민주당 측이 한때 북한 궤멸론을 말하여 말썽이 되었으나 여당 측 종북몰이 예방 차원에서의 선거전략상의 발언으로 치부되기도 하였다.

빈부격차의 극심한 심화는 토마 피케티 교수의 연구 등으로 국제적으로도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고, 국내적으로도 김낙년 교수의 비슷한 실증적 연구 발표가 있었음에도 재벌·세제 등 개혁의 과제는 쟁점화되지 못했다. ‘공안검찰국가화 경향’에 대한 문제제기도 없었다. 중도화의 흐름 속에 가장 중요하고도 심각한 문제는 눈감고 넘어간 것인가. 겨우 최저임금의 인상을 각 당이 경쟁적으로 발표하여 부각된 정도였다. 이 문제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한발짝 더 나아가 우리 경제의 근본문제까지 다루었어야 했다. 그런데 더민주의 경제민주화 제기마저 다만 출발선인 구호 단계에서 답보하였을 뿐이다. 미국 민주당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이슈 제기에 비하여 볼 때 우리의 정책 대결은 맹물 같기만 했다.

고명한 경제학자인 정운찬 전 총리는 최근 신문 기고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발언을 했다. “… 재벌의 권력화나 언론 종교 관료집단 등의 배타적 지배구조의 문제가 공론의 장에서 멀어지고 있다. 이번 선거가 사상 최악의 깜깜이 선거가 될 거라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여야 정당들이 너도나도 ‘우클릭’하는 현실에서 누가 정권을 잡든 특권 카르텔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라는 진단은 괜한 걱정이 아니다.” 정확한 진단이다.

걱정이 되는 것은 야당의 선거전에 있어서의 중도화가 혹시라도 본질적인 변화가 되는 것은 아니냐는 것이다. 보수·수구 언론의 힘이 그 뒤에 있는 재계 등도 포함하여 막강하고 보니 야당들이 아예 거기에 그냥 순응하여 세력이나 키워보겠다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공격을 피하기 위해, 표를 얻기 위해 아예 그들에게 투항했다고도 여겨진다. 정운찬씨가 말하는 특권 카르텔의 손바닥 위에서 춤추는 꼴인가.

앞으로 선거 때의 중도화, 무기력화, ‘투항’에서 야성을, 야당의 투쟁력을 회복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선거철이 끝나면 달라지는 것을 보기도 했지만 말이다.

더민주는 김종인 대표의 이른바 경제민주화를 내세워 득을 본 것 같다. 알맹이는 제시하지 않고 구호만을 내걸어 선거를 했다고 할 수 있다. 김 대표가 민주노총을 방문하여 비판성 발언을 한 것을 놓고 논란이 있었으며, 김동춘 교수는 ‘노동 없는 경제민주화’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언론인 임재경씨는 “경제민주화를 비스마르크적으로 보는 게 아니냐”고 촌평을 했다. 밑에서부터의 역동적인 힘은 누르고 위에서 시혜적으로 베푼 것이 독일제국 철혈재상 비스마르크의 수법이었다. 하기는 김 대표는 ‘계몽군주’ 같다는 언론의 평도 받았다. “각계의 노력이나 투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가 아니라 “내가 잘 알고 있으니 따라오라”는 식이라는 것이다.

우리 헌법 제119조 2항의 경제민주화 조항은 평지돌출한 게 아니라 오랜 역사적 배경이 있다. 우리 임시정부의 후반에 공식 정치원리가 된 삼균주의는 그 정신이 제헌헌법에 대폭 수용되었다. 심지어는 이익균점 조항까지 있었다. 119조 2항은 그런 제헌헌법의 정신을 이어받기도 하고, 독일에서의 ‘사회적 시장경제’ 등의 원리에 영향을 받아 성안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경제민주화가 위에서부터 시혜적으로 주어지느냐, 밑에서부터 역동적으로 형성되느냐의, 어느 쪽 사고방식을 따르느냐의 문제다. 자명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독립운동 과정이나 제헌 과정에는 대립되는 여러 사상의 격랑 속에서의 타협이 있었다. 독일에서도 마찬가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혁명적 상황을 겪어가며 탄생한 것이 바이마르공화국이고 한때는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담당했었다. 그리고 나치즘의 모진 꼴을 당하기도 했다. 그런 역사적 배경에서 그 타협과 조화의 소산으로 나온 것이 사회적 시장경제이고, 우리가 말하는 독일 모델이다.

우리 사회의 각계각층이 모두 노력하고 작용하여야 겨우 이룰 수 있는 일이다. 노조, 직능단체, 시민단체, 정치단체를 비롯하여 지방정부, 중앙정부와 의회에서 모두 노력해야 할 일이다. 그 중심세력이 정당임은 물론이다.

헌법 제119조 2항은 방향만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앞으로 그런 방향의 입법에 있어서 보호벽이 된다. 미국의 뉴딜 때도 그랬지만 경제민주화의 입법은 기득권층에 의한 위헌 시비에 부닥칠 수 있다. 근래 더욱 보수화되어 가는 헌법재판소다.

정치를 오래 관찰해온 나의 결론은 우리 정치의 진일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진보정당이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권자 표수로는 이미 충분한데 승자독식의 제도가 가로막고 있다. 보수정당과 약간 개혁성은 있으나 매한가지인 또 다른 보수정당인 양당제로는 우리 정치가 답보를 면하기 어렵다. 국민의당이 제3당으로 탄생했으나 비례대표제의 대폭 수용 없이는 일시적 현상일 뿐일 것이다.

진보정당이 원내교섭단체로서의 발언권을 갖고 끊임없이 개혁과제를 제기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얼마간이라도 정치가 진전하리라고 본다. “비례는 대표의 원리요, 다수는 결정의 원리다”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결정에는 우선 합의제도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다수결이다. 그러나 국민의 대표를 뽑는 일은 비례에 따르는 것이 원칙이다. 가령 심한 경우 51%의 득표자가 49%의 득표자를 누르고 독식하는 1선거구 1인제는 대표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의원 전원을 비례로 뽑는 나라를 따라가자는 것은 아니다. 정치 안정성의 문제도 있다. 독일 정도로 절반을 비례대표로 하는 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알맞을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독일에서처럼 지역구와 비례대표의 동시출마도 가능하게 길을 터놓아야 하리라고 본다.

우리나라 진보정당이 근래에 10% 넘는 득표율을 보인 일이 있다. 비례의 원리대로라면 20석인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을 충족하고도 훨씬 웃도는 의석수를 가져야만 한다. 이미 진보정당이 원내교섭단체를 이룰 수 있는 유권자의 기반은 갖추어져 있다. 다만 제도가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분단국가인 우리의 특수상황에서 진보정당이 다수당이 된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러나 원내교섭단체는 최소한 이룰 수 있어야 우리 정치가 진일보할 수 있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남재희 언론인
남재희 언론인
또한 만약 개헌이 있을 경우에는(대통령제의 경우) 대통령선거에 있어 결선투표제도 도입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야만 정당연합의 정치가 쉬워진다. 다양화된 사회의 정치는 유럽에서 보는 것처럼 연립정치일 수밖에 없다. 나는 당분간은 대통령중심제가 필요하겠지만 머지않은 장래에 우리도 의원내각제로 전환하여야 하리라고 내다본다. 그러려면 대통령중심제에서도 정당연합의 정치훈련을 축적할 필요가 있다.

남재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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