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안방의 세월호’라는 비유를 통해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보도됐다. 이 표현으로 사건의 심각성이 ‘확 와 닿았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수사는 모종의 위화감을 느끼게도 한다. 이 표현은 바꿔 말하면, 사건이 ‘안방’에서 일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내 일’로 인식하게 됐다는 뜻이니, 그만큼 세월호 사건을 체감 불가능한 비일상적 영역에 고정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체감의 거리를 재단함으로써 ‘나’를 사건으로부터 분리시켜온 것이 그간 세월호 사건을 외면해온 방식 아니었던가. 게다가 여전히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행동이 지속됨에도, 세월호 사건을 그저 비극의 레토릭으로 소비하는 것은 씁쓸하다. 이게 ‘실재’에서 ‘재현’의 영역으로 넘어간 사건이 기억되는 방식일까.
드라마 <태양의 후예>는 이국의 지진을 활용한 ‘재난멜로’라 불렸다. 세월호 사건을 연상케 한 이 설정은 ‘그때 그랬더라면’이라는 가정법 과거완료의 화법으로 일종의 ‘소망 성취’를 재현한다. 주인공인 군인과 의사는 컨트롤타워의 역할에 충실하고, 의사결정은 합리적이며, 추모의례도 마련된다. 이걸로 충분할까? 구조물에 깔린 두 노동자가 있다. 한 명을 구하면, 다른 한 명은 사망. 결국 살기를 염원한 외국인 노동자는 구조되고, 나이 든 한국인 노동자는 관용을 보이며 죽는다. 이때 강조되는 것은 매뉴얼에 따라, 슬프지만 용단을 내리는 주인공들의 영웅적 활약이다. 이를 위해, 이 드라마는 피해자들의 생사를 치킨게임처럼 자극적으로 묘사하고 고통을 전시했다.
한편, 올 초 방영한 <시그널>에서 ‘오경태’는 누명을 쓴 피해자이자, 화재로 딸을 잃은 유가족, 딸의 죽음을 유도했다고 여겨진 한 남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딸을 살해한 가해자라는 세 겹의 정체성을 지닌다. 그가 사고의 구조적 원인을 보지 못한 채 또다른 사고 당사자의 딸에게 복수한 방식은 자신의 딸처럼 그녀도 불에 타 죽게 만드는 것이었다. 가능한 설정일까? 세월호 유가족들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반복돼선 안 되기 때문에’ 지금까지 싸운다.
주인공은 그에게 이 모든 사태를 방조한 ‘더 큰 범인’을 잡자며 수사협조를 호소한다. 그런데 정작 이후 오경태의 싸움은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한 것인지, 딸의 죽음을 해명하기 위한 것인지 불분명하다. 강조되는 것은 그를 설득해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의 분투다. 하지만 유가족에게 싸움의 목적을 자각하는 일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걸 사유하는 과정에서 유가족은 유가족에 머물지 않고 주체적으로 싸우는 ‘시민’이 된다.
이 모든 허구 서사물들의 재현법에 예민해야 이유는, 이것이 ‘세월호 이후의 서사들’이기 때문이다. <세월호, 그날의 기록> 같은 르포들은 왜 세월호 사건이 한낱 음모론이나 감성정치의 대상이어서는 안 되는지를 보여준다. 수많은 드라마틱하고 미스터리한 요소들이 있음에도, 이 책들은 아주 담담하고 사려 깊게 써졌다. 그러나 허구의 재현물들은 직접 사건의 진상을 밝힐 수도, 대안을 제시할 수도 없다. 오직 사고를 통해 공동체가 얻게 된 지혜를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사고 당사자에게는 그 경험이 그저 무의미한 상처로 남지 않았음을 깨닫게 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바로 그 당사자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알게 하는 것. 이마저 못한다면 ‘재현’은 실제로 사건에 개입하고 사회를 바꾸는 정치, 경제, 법학, 역사, 운동에 비해 참 쓸모없을 것이다.
오혜진 문화연구자
오혜진 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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