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자신만만하던 이세돌부터 기가 꺾이면서 인공지능이 통제에서 벗어나 지배자로 군림할 수도 있다는 불안한 예감에 젖게 했다. 그즈음 몇 권의 책을 잇달아 읽었다. 아아, 요즘의 나는 주책없는 독서에 빠져 풍차에 대든 얼뜨기 기사 돈키호테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헤세의 <유리알 유희>에 가장 가까운 실제 경기가 바둑이 아닐까 생각도 한 ‘자칭 만년 3급’의 나도 지난 3월의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장면과 해설, 신문 기사와 논평들을 따라가며 보고 읽었다. 20년 전의 체스나 5년 전의 퀴즈쇼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번의 대결은 기계와 인간의 고급한 지능 경기였다. 꽤 오래전, 6, 7급 정도로 평가된 컴퓨터 바둑을 두다 문득 짓궂은 생각이 들어 엉뚱하게 텅 빈 맨 구석점(1, 1)에 놓았더니 그 소프트웨어도 내가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버벅거리다가 뜻밖의 자리에 돌을 놓는 버그를 보였다. 기계도 당혹해할 때가 있구나 하고 고소해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 것은 세계 최고수와 겨룰 정도로 수준이 전혀 다를 것이었다. 실제로 관련 기사 모두가 그렇게 보도했다. 당초 자신만만하던 이세돌부터 기가 꺾이면서 잇단 해설과 칼럼들이 신기술의 하나라고 진정시켜주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인공지능이 통제에서 벗어나 지배자로 군림할 수도 있다는 불안한 예감에 젖게 하는 등 갖가지 평가와 전망으로 착잡했다.
나는 그즈음 몇 권의 책을 잇달아 읽었다. 거시적 관점으로 인류사를 훑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는 인간이 자연선택을 지적 설계로 대체하고 있으며 그것은 생명공학, 사이보그, 비유기물 공학으로 전개될 것이고 인류는 아마도 ‘특이점’으로 접근하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기술의 충격>에서 강한 인상을 주었던 케빈 켈리는 그보다 10여 년 앞서 발표한 <통제불능>에서 ‘태어난 존재’와 ‘만들어진 존재’, 곧 자연의 생물과 인공의 사물의 결합을 내다보며 그것을 ‘공진화’란 말로 요약하고 있다. 그 저자가 아르헨티나의 기발한 작가 보르헤스가 <미로>에서 상상한 ‘형태박물관’에 대해 묘사한 것을 보고 ‘깊은 학습’에 이르는 알고리즘을 내 멋대로 짐작해보았다. 가령 ‘나’라는 주어를 쓰고 거기에 붙일 숱한 목적어 중 ‘글’이란 말을 짚고 그 말에 이을 ‘쓴다’ ‘읽는다’ ‘지운다’ ‘고친다’ 등 여럿 중 하나를 잡는다. 그 문장을 끝내면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 따위 이음씨들 중 하나가 달라붙어 어느 말길 한 가지로 생각을 끌어갈 것이고 이 연동 과정으로 한 문단의 글이 이루어질 것이다. 나뭇가지 뻗치기 같은 알파고의 ‘딥 러닝’ 알고리즘을, 작가 황순원의 “문장은 붓 가는 대로 끌려간다”란 명언의 아날로그적 글쓰기의 실제로 옮겨 이해해본 것이다.
그럼에도 인공지능에 대한 얕은 이해 가운데 여전히 궁금한 것들이 있었다. 정보량이 엄청나고 연산 능력이 인간보다 수억 배 빠르더라도 그 기계가 과연 ‘인간적’ 사유와 감성, 인식을 가질 수 있을까; 자율자동차가 갑자기 튀어나온 어린이를 그대로 치고 말 것인지 뒤차와의 충돌을 선택할 것인지 순간적인 도덕적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글을 쓸 때 필자의 독특한 감수성과 문체를 발휘하며 내 개인적 정서와 회상을 떠올리거나 상상하며 독자와 공감을 일굴 것인가; <인간 대 기계>의 김대식 말대로 강아지와 고양이를 잘 구별 못하는 수준으로 복잡한 현장 상황을 총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을까. 과연 컴퓨터가 인간 특유의 ‘사유 능력’ ‘선택의 정신’ ‘자유의지’를 발휘할 것인지. 창의성, 개성, 직감 혹은 공상이나 꿈은? 짐작하기 어려운 그 의문들이 크리스 그레이의 <사이보그 시티즌>과 마틴 포드의 <로봇의 부상>이란, 기술적 서술이 많은 책으로 나를 이끌었다. 컴맹에 가까운 나는 이 책들의 설명을 알아듣긴 어렵지만 그것들이 어떤 미래 사회를 불러올 것인가에 대한 약간의 예상은 가능했다.
인공지능으로 말미암은 “인간과 기계의 아주 특별한 공생”을 예상하고 있는 그레이는 그 둘 사이의 ‘인위적 불연속’이 사라져야 한다며 “이제 모든 것을 인공적으로 볼 수도 있고 자연적인 것으로도 볼 수 있”음을 지적하고 인권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에 의한 정치 사회적 생태 변화에 대응할 것을 권하고 있다. 마틴 포드는 더 구체적이고 이해하기 쉬운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소프트웨어 창업자이면서 경영학자로 소개된 그는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져왔던 분야로 컴퓨터가 진입하기 시작했다”며 과학기술은 물론 교육, 의료, 법률, 예술 등 인문적 인간 활동의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실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그것들이 인간보다 훨씬 능률적이고 정확하며 실용적이란 점을 강조한다. 무인자동차는 보복운전을 하지 않을 것이고 약제사 로봇은 술에 취해 실수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컴퓨터는 숱한 판례들을 충분히 대조하고 주식 변동도 훨씬 빠르게 판단할 것이며 학생들의 리포트 표절을 교수보다 더 쉽게 가려낼 것이다. 우리도 미처 알지 못하는 새, 로봇은 이미 우리 몸 안 여러 속으로 들어와 ‘600만불의 사나이’처럼 고장난 신체기관을 바꾸거나 더욱 능률적으로 기능화하고 있다. 컴퓨터는 이미 야구 경기를 기사로 썼고 소설, 그림, 작곡 등 예술 창작도 실험 중이다. <터미네이터>의 인공인간 출현도 허황한 것은 아니리라. 옥스퍼드대 연구자들은 20년 이내 사람들의 일자리 47퍼센트를 인공지능이 차지할 것으로 예측했는데 한국고용정보원도 자동화로 없어질 업종으로 콘크리트공, 플라스틱제조원, 보조교사, 육아도우미 등 30가지를 꼽았다. 다행히 예술가들은 걱정을 늦춰도 될 듯하다.
“외계인들은 여가, 오락, 기타 지적 추구 같은 데는 관심이 없다. 이들에게는 가정, 사적인 공간, 사유재산, 돈 같은 개념도 없다. 잠을 자야 한다면 그저 일터에서 서서 잔다. 미각이 없기 때문에 무엇을 먹든 상관하지 않는다. 이들은 무성생식을 하며 몇 달 만에 성숙한 개체가 된다. 이성을 유혹할 필요도 없고 여러 개체 사이에서 나 혼자 뛰고 싶은 욕구도 없다. 이들은 오직 일만 한다.” 마틴 포드는 ‘외계인’으로 의인화한 인공 노동-지능과 더불어 살 사회가 30년, 늦어도 1세기 이내에 올 것으로 본다. 문제는, 이 ‘포스트 휴먼’인 로봇으로 생산과 함께 경제의 또 다른 축인 소비가 그만큼 줄어 소득의 파이가 작아지고 중산층이 와해되며 노동자들의 실업이 더 심해지리라는 점이다. 여기에 정보기술의 발전으로 임금 정체, 근로자들의 위축, 불평등의 심화와 양극화 등 어두운 미래를 예고하면서 자칫 인류에게 닥칠 수 있을 ‘퍼펙트 스톰’을 경고한다.
앞으로 세계가 로보, 인포, 나노, 바이오 등등 사물과 인간이 공진화하여 서로 행복한 화해를 이루며 지구를 공유하고 자연과 문화, 유기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의 구분이 희미해지는, 지구과학자들이 말하는 ‘인류세’(人類世)를 넘어 ‘인공세’(人工世)로 넘어갈 수도 있고, 인공지능이 자칫 “나는 저항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카뮈식 실존적 각성으로 인간에게 도전하거나, 마담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처럼 보복해올지도 모른다. <제2의 기계시대> 저자는 “기술은 운명이 아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낙관의 끈을 놓지 않지만, 1920년대의 자먀찐은 디스토피아 소설 <우리들>에서 “인간화한 기계와 기계화한 인간은 결국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가장 고상하고 외경스런 미였고 조화였고 음악이었다”고 쓴다. 그 소설 무대는 인간이 이름 없이 번호로 불리는, <1984년> <멋진 신세계>보다 더한 전체주의 사회다. 아아, 요즘의 나는 주책없는 독서에 빠져 풍차에 대든 얼뜨기 기사 돈키호테가 되고 있는 건 아닌지.
김병익 문학평론가
김병익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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