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들이 치는 장난이 있다. “안경 쓴 사람 모여” “머리 짧은 사람 모여”. 다수가 가진 특징으로 소수를 만들어내는 장난이다. 심해지면 “스마트폰 가진 사람”을 찾으며 소유로 차이를 만들기도, 장애를 건들기도 한다. 이런 장난은 소수 쪽을 분노하게 해, 소수 집단에 낀 아이는 기를 쓰고 다른 나눔의 기준을 만들어낸다. 얼굴에 점 없는 사람, 학원차 타고 오는 사람. 별별 차이가 드러난다. 그러다 보면 세상에 비슷한 초등학생이 없다.
동일성을 확인하는 것보다 차이를 발견하는 게 더 쉽고 자극적이다. 차이를 이용한 분리는 손쉽고, 사회를 통제 관리하는 데도 유용하다. 어릴 적 한번은 들어본 동화가 있다. 흰 염소, 검은 염소, 그리고 염소를 잡아먹는 늑대 이야기다.
언젠가부터 염소들이 잡아먹히길 거부하고 맞서 싸우자 굶주린 늑대들은 방도를 낸다. 수가 적은 흰 염소만 잡는 것이다. 이 일이 반복되자 검은 염소들은 늑대가 와도 싸우지 않는다. 사냥은 쉬워진다. 흰 염소가 모두 사라지자 늑대들은 아무 염소나 잡아먹는다. 그래도 염소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싸우는 대신 고민한다. 저 염소는 왜 먹혔지? 다리가 짧아? 암놈이라? 체구가 작아?
사람은 다수 또는 안전한 부류에 속하길 원한다. 검은 털을 가지면 먹히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나뉘는 기준을 고민하고, 그 기준에 부합하려 애쓴다. 시험에 합격하려, 정규직이 되려, 특정 지역에 살려, 다이어트를 하려 애쓴다. 문득 인생을 저당 잡힌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열심히 산다.
노력해 모두가 특정 그룹에 오르는 해피엔딩은 동화에도 없다. 나뉘고, 나뉜다. 그러다 자신과 별다를 것 없는 부류가 큰 이득을 얻거나, 소수 집단이 불이익을 받지 않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나는 이렇게 노력하는데 너흰 왜 공으로 얻어? 파이는 한정돼 있다. 저들이 더 가지면, 내 몫이 적어진다.
그래서 비정규직 차별이 문제라고 말하면서, 공공기관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는 정책에는 반발한다.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고임금을 받는다는 사실에도 분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보다 우월하다 여기거나 내가 들어가고 싶은 부류인 대기업 사무직이 고임금을 받으면 ‘꿈의 직장’이라 부르면서 말이다. 생산직이건 사무직이건 대기업 고임금의 근원은 같다. 수탈에 가까운 하청업체 수직계열화. 그리고 소비자 호구 만드는 독점. 수탈의 주체가 누구인지, 호구의 대상이 누구인지는 애씀 속에서 흐릿해진다.
욕을 먹는 쪽도 자신의 존재를 잊는 건 마찬가지. 고임금 강성 노조의 대표 격인 현대자동차 노조는 자신의 공장에서 버젓이 일어난 폭력에 별 반응이 없다. 얼마 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2차 하청업체 직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직장을 잃었다. 내쫓기는 과정에서 혹독한 매질이 있었다.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같은 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은 잠잠하다. 색이 달라 그런 게다. 흰 염소라 그렇다. 어쩌면 다리가 긴, 점이 있는, 눈이 큰 염소라 그런지도 모른다. 매질당하는 이들은 나와 같은 염소가 아니고, 나는 아직 괜찮다고 여긴다.
우리가 욕할 대상은 흰색임에도 잡아먹히지 않는 염소가 아니다. 동료 염소가 먹히는 걸 보며 제 털 색깔부터 확인하는 염소다. 늑대를 욕하지 않고, 염소끼리 차이를 확인하고 나누는 일이 습관이 되면 누구든 그렇게 된다.
희정 기록노동자
희정 기록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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