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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인문학 위기? 인문학 위축·통제의 전략이다!

등록 2016-05-17 19:19수정 2016-05-19 10:08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약 반년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한 학술회의 참석차 몇명의 러시아인 동료와 같이 서울에서 머물렀다. 숙소에서 회의 장소로 이동할 때에 다 같이 소형버스를 탔는데, 운전대 옆에 놓여 있는 <한 권으로 읽는 사기(史記)>라는 책을 봤다. 러시아 동료들에게 운전사가 약 2천년 전의 중국 사가의 저서를 즐겨 읽는다는 말을 하니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이었다. 러시아 같으면 운전사가 고대사를 탐독하는 것은 소련 시절에는 있을 법도 한 일이었겠지만 현재 같으면 거의 상상하기가 어렵다. 인문학 교양을 읽을 여유가 점차 증발해가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한국 대중이 지니는 인문학에 대한 애정은 세계에서 거의 독보적이다. 내가 사는 노르웨이만 해도, 인문학 학도 이외에 내가 아는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그 유명한 ‘바이킹 시대’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 없다. 중세 노르웨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며, 관심이 가는 게 있다면 현재성이 강한 현대사 정도다. 그러니까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중세사 교양서가 거의 200만부나 나갔다고 이야기를 하면 아무도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판매부수를 기록하는 것은, 북유럽 같으면 오로지 추리소설과 아동물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이념가들까지 편승하여 자신들의 이념선전을 ‘인문학’이라고 포장할 정도로 한국인에게 인문학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위기”인가? 인문학에 “경쟁력이 없다”고 하지만 인문학이 자연과학과 ‘경쟁’한다는 것은 한 인간의 머리와 손이 서로 ‘경쟁’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조상들의 ‘못 배운 한’ 덕인지, 집단의식의 상당 부분을 역사 담론들이 차지해서인지, 한국인의 인문·교양 열풍은 대단하다. 문제가 있다면 자본과 친자본 지식인들이 이를 이용하는 거야말로 문제다. 서점가에서 늘 베스트셀러 코너를 점령한다 싶은 자기계발서들을 보면 이거야말로 인문학의 탈을 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선전이라는 생각은 든다. 자기계발서의 대부분은, 근대 초기에 일본과 조선에서 개화론자들 사이에서 히트를 친 새뮤얼 스마일스(1812~1904)의 <자조론>의 아류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핵심 주장은 대체로 여전하다. “노력하면 다 된다, 사회를 어차피 바꿀 수 없으니까 자신부터 바꾸라, 감정을 조절하여 긍정적으로 사고하기만 하면 길이 열린다….” 취업 포기자나 취업 준비자까지 포함하는 체감 청년 실업률이 이미 34%를 넘은 참극 같은 상황에서 ‘노력 만능론’은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어법은 심히 반사회적이며 비도덕적이다. 청춘들까지 포함해서 납세자들이 국가에 세금을 납부하는 이유는, 국가가 청년고용 대책 등을 통해서 시장이 불가피하게 끼칠 ‘아픔’을 완화라도 해야 하기 때문은 아닌가? “아프니까 청춘이다” 식의 어법은, 국가의 책임 유기에 대한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멈추어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하고, 아무리 “내 안에서의 분노를 조절하기” 하고, 아무리 “마음 비우기”를 잘해도 가장 영적인 개인도 청년실업이나 ‘열정페이’ 등 착취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개인적 해결을 권고하는 것은 넓은 의미의 대중에 대한 기만에 불과하다. 물론 노력도 의지력도 명상도 욕망을 줄일 줄 아는 지혜도 개개인에게 필요하지만 이런 한 명 한 명의 자기 조절이 사회 속에서 다수의 비극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개개인의 운명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로환으로 암을 치료해보는 시도와 같다.

한국은 대졸자의 30% 이상이 이공계다. 노르웨이는 15%밖에 안 되고, 미국은 아예 그 이하다. 브라질은 10%보다 약간 높다. 정부가 3년간 2012억원을 투입해 “인문사회 예체능 계열 정원을 이공계열로 조정하도록 유도하는” 프라임 사업을 한다. 이미 소수인 집단을 돈 들여 더 줄일 정도로 인문학이 두려운가?

자본의 이념가들까지 편승하여 자신들의 이념 선전을 ‘인문학’이라고 포장할 정도로 한국인에게 인문학은 중요하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위기”인가? 인문학에 “경쟁력이 없다”고 하지만 인문학이 예컨대 자연과학과 ‘경쟁’한다는 것은 한 인간의 머리와 손이 서로 ‘경쟁’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저 서로 기능이 다른 두 분야이며, 정상적인 사회에서라면 상호 보완하면 된다. “경쟁력 부족” 이야기는, 결국 “인문대 출신 취업률 저조”로 귀결되곤 한다. “취업률 저조”라는 말을 보다 직설적이며 현실적인 표현으로 바꾸자면 대기업부터 솔선수범하여 인문학 전공자들을 차별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실제 소위 ‘4대 그룹’의 신입사원 채용 정보를 분석해보면 70~80% 정도는 이공계 출신들이다. 다른 기업들도 대체로 이와 같은 재벌기업들의 관행을 따르는 추세이니 인문학 전공자들은 한국 사회의 수많은 피차별 집단 중의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는 좀더 솔직한 서술일 것이다.

차별을 해소하는 방식들은 사실 여러 가지일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사회는- 각종의 국고 지원금을 여러 가지 명목으로 받고 이런저런 세제 혜택을 받는- 대기업들에 신입사원 공정채용을 요구할 수도 있다. 특별한 기술지식을 필요로 하는 순수기술직이 아닌 이상, 기업이 각 계열의 전공자들을 균형등용하는 것도 사회정의 구현의 방법이 아닐까? 이와 동시에 인문대 출신에 대한 고용대책 마련을, 인문대 출신들을 포함해서 모두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국가에 요구할 수도 있다. 사실 내가 재직하는 오슬로대 인문학부의 졸업생 같은 경우에는 학사 졸업자의 43%, 그리고 석사 졸업자의 59%는 공공부문에 취직한다. 인문학 전공자들은, 각종 박물관이나 아카이브, 공공 평생교육센터나 공공연구기관에서 필요하기에 인문학부 취업률은 80%에 달한다. 그러니까 취업률 저조가 “위기”의 내용이라면 인문학도에 대한 국가적 고용 창출이 이루어지도록 투쟁을 벌이는 것은 맞을 것이다.

한데 세금을 납부하면서도 부당하게 차별을 당하는 이들이 그 세금을 받아먹으면서도 아무런 차별 해소 대책도 취하지 않는 국가에 항거하는 것은 정상적 사회의 이야기이지 대한민국의 사정은 그 정반대다. 인문학 전공자들이 차별을 받는다면 한국에서는 그 해소 대책은 피차별 집단을 더더욱 위축시키는 것이다. 사실, 한국은 이미 대졸 중에서 이공계의 비율이 세계적으로 대단히 높다. 30% 이상이나 되는데, 내가 사는 노르웨이는 15%밖에 안 되고, 한국인들이 그렇게도 우러러보는 미국은 아예 그 이하다. 굴지의 제조업 국가인 브라질은 10%보다 약간 높다. 이처럼 자본의 확대재생산, 그리고 기업의 이윤 뽑아내기와 직결되는 전공들의 비율이 이미 높은데도, 국가부터 앞장서서 인문학을 더 위축시킨다. 최근에 정부가 3년간 2012억원을 투입해 “인문사회, 예체능 계열 정원을 이공계열로 조정하도록 유도하는” 프라임이라는 사업을 한다. 21개 대학을 선정하여 그 어마어마한 돈을 투입시켜 2626명의 인문사회계열 정원을 포함하여 각종 “비경제적인” 학과 정원을 줄여보겠다는 것이다. 인문학 특유의 반란성은, 이 국가로서 이미 소수인 집단을 돈 들여 더 줄일 정도로 그렇게도 두려운가?

같은 돈을 사회적인 인문인프라 구축에 투자해서, 신진기예 인문학도들에게 예컨대 공공부문에서 운영하는 각종 아동 과외교육 기관, 인문학 동아리 등에서 아이들에게 인문사랑의 씨앗을 뿌리게 해주었다면 되지 않았을까? 나만 해도 평생 역사와 인연을 맺게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어렸을 때에 5년 동안이나 중·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동시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고고학 동아리에서 매주 2회에 걸쳐서 국립대학 역사학부를 나온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역사 공부의 흥미에 푹 빠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훨씬 가난한 북한만 해도, 아이들에게 이와 같은 방식으로 어릴 때부터 인문학적 소양을 쌓을 기회를 국가가 제공해준다. 국내 보수는 소련이나 북한을 통상 ‘전체주의’라고 매도하지만, 모든 교육기관들을 고시원이나 취업학원처럼 일률적으로 운영하는 거야말로 전체주의적 발상은 아닌가?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1990년대 후반 이후의 ‘비케이’(BK·두뇌한국)나 ‘에이치케이’(HK·인문한국) 사업처럼 주로 비정규직 자리를 양산하면서 인문학도들을 철저한 통제를 받는 논문 생산 기계로 만드는 것은 “인문학 위기”의 해소가 아니고 인문학을 관의 통제 밑에 두어서 그 영혼을 죽이는 일일 뿐이다. 거듭 이야기하자면, “인문학 위기”는 없으며, 정부의 정책들이 계획적으로 심화시키는 인문학에 대한 관·기업의 차별이 있을 뿐이다. 인문학도들이 이와 같은 상황을 직시하여 인문학의 공공가치에 중점을 두어서 “인문학 하기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싸움에 나서야 할 때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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