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자들의 48%가 ‘분별력과 감수성’을 선택했지만, 그보다 조금 많은 52%가 ‘오만과 편견’을 선택했다.” 미국의 토크쇼 진행자인 빌 마어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곧 ‘브렉시트’ 결정을 제인 오스틴의 소설들에 빗대어 한 말이다. 1960년대 말 영국은 대영제국의 영광을 뒤로하고 유럽의 병자로 전락했다. 그랬던 나라가 1973년 유럽경제공동체에 가입하면서 새롭게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생산성이 높은 금융·첨단제조업·사업서비스 분야에 특화했고, 무역자유화를 통해 수출을 늘렸으며, 외국인 직접투자도 많아졌다. 이는 브렉시트가 현명한 선택일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럼에도 탈퇴 진영은 국수주의적 오만이나 인종주의적 편견과 같은 부정적 정서를 부추김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진흙탕으로 몰고 갔다.
영국독립당의 나이절 패라지 당수와 보수당의 보리스 존슨 전 런던시장 같은 인기영합 정치인들은 투표의 기본 구도를 특권층 대 서민의 싸움으로 설정하고 노인층, 저소득층, 교육수준이 낮은 계층, 지방 거주민 등의 분노에 불을 붙임으로써 탈퇴 진영의 표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탈퇴 진영은 분노한 대중에게 분명한 표적을 알려주기까지 했다. 탈산업화로 일자리를 잃은 북동부 노동자들에게는 천문학적 소득을 올리는 런던의 금융 전문가가, 외국인의 대량유입으로 연금 축소를 우려하는 노인들에게는 유럽 27개국에서 살고 일할 기회를 향유하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몫을 빼앗아간 주범으로 제시되었다. 많은 영국인들에게 이번 투표는 그들의 고통과 불만에 공감해주는 새로운 정치세력과 손을 잡고 분노의 대상을 심판하는 자리였던 게다. 그들은 기성 체제의 수혜자가 아니라 피해자였으며, 불만과 분노를 표출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잔류를 주도한 기성 정치권은 그들의 불만을 집단 이기주의로 폄하하며 훈육하려 들었다. 이들에게 ‘분별력’은 있었는지 모르지만 주요한 의사결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대중의 아픔에 충분히 공감하는 ‘감수성’은 부족했던 셈이다. 이들이 진정으로 ‘감수성’을 갖춘 정치인들이었다면 ‘사악한’ 정치인들이 인기를 얻지도 못했을 것이고, 잔류 결정과 함께 역사는 다르게 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기존 경제시스템의 작동 실패에 있을 듯싶다.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들려오는 분노의 외침은 자유시장과 경쟁논리의 확산을 만병통치약으로 보던 기존의 패러다임이 한계에 부딪혔음을 시사한다. 아직은 그 분노가 퇴행적인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로 표출되고 있지만, 시대정신에 맞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할 경우 이를 제도화할 강력한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우리의 경우도 ‘대중의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대담한 상상력을 발휘해 경쟁에서 밀려났거나 가치분배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는 청사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고 사회적 약자의 권리를 높이는 것 이상의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인적자본과 높은 숙련에 힘입어 이익을 독식했던 계층과 경쟁의 제한으로 ‘렌트’를 안전하게 누렸던 전문직들도, 세계화가 더욱 심화되고 인공지능과 로봇이 출현함에 따라 그간의 ‘루저’들과 다를 바 없는 운명에 놓일 날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긴 안목으로 보자면 변화된 환경에 조응하는 새로운 가치생산 및 분배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적 협약을 어떻게 맺을 수 있을지가 결정적인 과제일 것이다. 이게 브렉시트 사태가 주는 진정한 교훈이다.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교수
박종현 경남과학기술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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