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타자로서의 ‘동포’, 조선적 재일조선인

등록 2016-07-12 20:13수정 2016-07-12 20:25

혈통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는, 더 가난하거나 이념이나 생활방식이 다른 정치체 출신의 “같은 한국인”에게는 왜 이토록 잔혹하게 배타적일까? 권위주의 시대가 낳은 ‘우리’ 공동체를 구성하는 획일적 방식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조선족이나 고려인, 탈북자 등은 적어도 국내의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가시성이 있는 존재들이다. 차별을 더 받아도 거의 가시화되지 않는 또 하나의 ‘타자화된 한국인’ 소집단이 있다. 바로 조선적 재일 조선인들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한국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야기 중의 하나는 한국인에게 유독 혈통주의적 경향이 강하다는 평이다. 이해 안 될 일도 아니다. 문중을 기본 단위로 해서 이루어진 유교 사회에서 ‘민족’은 처음에 하나의 대가족으로 이해됐으며, 식민지 시대의 민족차별은 조선인들의 혈통적 민족 정체성을 역으로 강화시켰다. 역대 권위주의 정권까지 혈통적 민족주의를 계속 정치적으로 이용해온 결과, 현재도 ‘우리’로서의 정체성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핏줄’로 판단된다. 2년 전의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진정한 한국인이 되는 조건”으로서 응답자의 84%가 ‘혈통’을 언급한 것이었다. 물론 ‘혈통’보다 ‘국적’의 비중(89%)이 더 커진 것으로 봐서는 점차 민족적 정체성에서 국민적 정체성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 ‘우리’라고 간주되는 가장 보편적인 단위 중의 하나는 ‘혈통’이다.

외부 계통의 인구가 거의 3% 가까이 되는 상황에서는 혈통주의가 종족적 소수자들에 대한 배타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만큼 긍정적인 현상이 아닐 것이다. 한데, 한 가지 슬픈 아이러니는, 이렇게도 혈통의식이 강한 사회에서 가장 심하게 배제를 받는 사람들도 바로 혈통적 한국인들의 여러 집단이다. 혈통적 ‘우리’에 대한 배제를 유형적으로 분류해보면 순수 경제적 차별과 정치적 배타, 그리고 경제 차별과 정치적 불신의 혼합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순수 경제적 차별은, 주지하듯 “못산다”는 중국이나 옛소련에서 온 조선족·고려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일상적인 태도다. 1년 전 ㈔동북아평화연대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조선족’이라는 기호는 94%의 한국인 응답자들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 정도로 “못사는 동포”에 대한 ‘잠재적 범죄자군’의 이미지를 보수언론들이 성공적으로 형성시킨 것이다.

정치적 배타의 전형적 사례는 물론 북한에 대한 악마화다. 보수언론들이 “생지옥”이라고 선정적으로 그리는 북한에 대한 부정 일변도의 의식이 탈북자를 포함한 모든 북한 주민에게도 적용돼 북한인에 대한 한국인의 친밀감은 미국인이나 중국인에 대해 느끼는 친밀감보다 더 낮은 것으로 나온다. 탈북자 같은 경우에는 한국인의 경제적 우월감과 대북 적대감이 중첩돼 거의 전례 없는 차별의식으로 치닫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 사는 탈북자들의 거의 20%가 차별과 가난 속에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다는 통일부 조사 결과가 있는데, 혈통의식이 이렇게도 강한 사회에서 동일 혈통에 속하는 일군의 타자들에 대한 배타성이 대단히 높다는 역설적 상황을 잘 반영한다고 하겠다.

혈통을 이렇게도 중시하는 사회는, 더 가난하거나 이념이나 생활방식이 다른 정치체 출신의 “같은 한국인”에 대해 왜 이토록 잔혹하게 배타적일까? 권위주의 시대가 낳은 ‘우리’ 공동체를 구성하는 획일적 방식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박정희식 병영국가는, ‘우리’ 학교와 군대를 나오지 않거나 ‘우리’ 정보기관들이 관리하지 않는 타국의 영토에 사는 모든 혈통적 한국인을 일단 ‘간첩’이나 ‘친북’, ‘반체제 분자’로 의심해보는 분위기를 만들어놓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동백림 사건’,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그 수많은 ‘재일동포 간첩 사건’과 같은 조작된 ‘간첩사건’들은 외부에서 사는, 내지외부와 연결된 한국인에 대한 경계심을 잔뜩 심어놓았다. 거기에다가 박정희 시대의 “잘살아 보세”와 같은 경제 본위주의적·성공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빈민들을 비인간화시키는 경제인종주의를 한국인의 일상적 사회 인식의 일부분으로 만들었다. 결국, 지금 우리가 거두는 결과는 조선족 동포나 고려인 동포, 탈북자를 포함한 북한인에 대한 배제·차별·멸시의 분위기다.

한데, 조선족이나 고려인, 탈북자 등은 적어도 국내의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가시성이 있는 존재들이다. 북한인들은 국내에서 만날 수 없어도- 비록 매우 부정적인 시각 일변도의 보도긴 하지만- 텔레비전의 뉴스 화면에서라도 가끔 보인다. 가시성이 그나마 있는 이와 같은 ‘혈통적 한국인의 피차별 집단’과 달리, 차별을 더 받아도 거의 가시화되지 않는 또 하나의 ‘타자화된 한국인’의 소집단이 있다. 이는 바로 조선적(朝鮮籍) 재일 조선인들이다. ‘조선적’이 바로 북한 국적을 의미한다고 오해하는 한국인이 상당히 많을 만큼, 이 집단은 아예 국내에서 잘 알려지지 않아 아무리 차별받아도 그 차별에 대한 문제의식을 국내에서 찾기가 힘들다. 북한 악마화나 조선족을 범죄자처럼 묘사하는 언론들의 비뚤어진 태도에 대해 국내에서 그 나름의 비판 의식은 존재하지만, 조선적 재일 조선인은 존재감 그 자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아, 국가가 그들을 차별·배제해도 사회가 그 정책에 제동을 그다지 걸지 않는 형국이다. 그만큼 일본 주류의 여전한 식민주의적 차별 의식과 한국 정부의 사실상의 기민(棄民) 정책으로 점철된 재일동포들의 현대사가 국내에서 일반적으로 덜 알려져 있기도 한다.

많은 이들의 오해와 달리 ‘조선적’은 북한 국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저 한국 국적을 선택하지 않은 재일동포의 호적에 일본 당국자들이 식민지 시대의 한반도의 명칭인 ‘조선’을 기입했다는 점을 반영했을 뿐이다. 조총련 소속의, 즉 북한에 좀더 친화적인 재일동포들도 ‘조선적’으로 분류되지만, 상당수의 조선적 재일 조선인들은 남북한 양쪽에 대해서 소속감을 느끼면서도 분단체제인 만큼 양쪽 정권으로부터 등거리를 유지하려 한다. 그런 성향의 대표적인 조선적 재일 조선인은 바로 재일 조선인 문학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작가 김석범이다.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아마도 창작 활동하면서 살 수 없었을 거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그는, 남한도 북한도 아닌 통일 한반도의 시민이 되고자 하는 의미에서 실질적인 무국적인 ‘조선적’을 유지한다. 말하자면 통일지향적 중립의 태도라고 하겠다.

한데 군사주의적 획일화에 익숙해진 한국 사회로서는 명실상부한 ‘적’보다 중립을 지키려는 ‘우리 민족’ 계통의 ‘회색분자’가 더 위험시된다. 지금도 군부가 ‘주적’이라고 분류하는 북한의 고급 간부들이 이런저런 업무를 띠고 보수정권 밑에서도 종종 남한을 방문할 수 있었지만, 이명박이 대통령에 취임한 2008년부터 3만3천명 조선적 동포들의 한국행 길이 막히고 말았다. 위에서 이야기한 김석범 작가도, 지난 4월1일 제주에서 열린 4·3평화상 시상식에 가서 그가 받아야 할 상을 직접 받지 못했다. 입국거부라는 이름의 국가 폭력을 당한 것이다. 가장 최근에 위안부 성노예화 피해자들을 “일본군의 동지”이자 “애국 소녀”로 둔갑시켜 국내외에서 많은 물의를 빚은 박유하 교수(세종대)의 저술을 정밀한 방식으로 분석·비판한 일본 메이지학원대학 부교수 정영환이라는 또 한 명의 조선적 재일 조선인이 입국을 거부당해 한국에서 국역 출판된 자신의 저서 출판기념회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서 뉴질랜드부터 미국까지, 유럽·아시아·미주 한국학 전공자 수십명이 항의서명도 했지만, 한국 정부는 국제적 불명예를 감수하면서도 조선적 재일 조선인들에 대한 인권 탄압을 계속한다. 김석범이나 정영환처럼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름이 난 유명 지식인들도 그 대상이 되지만, 지식계와 무관한 조선적 재일 조선인들도 일가친척조차 만나지 못하고 조상의 성묘조차 못 가면서, 그저 일본과 한국 사이의 ‘신종 38선’(?)을 바라보며 한탄할 뿐이다.

한국의 보수 정권이 이런 강경책으로 조선적 조선인들의 한국 국적 취득을 가속화할 수 있다고 인식한다면 이는 오산에 불과하다. 국가의 폭력이 저항을 부르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는 상처만 쌓여갈 것이다. 하루빨리 조선적 재일 조선인에 대한 부당 대우를 철회하고, 그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서 다양한 이념적 성향들을 충분히 존중해주는 평등한 소통의 태도를 가지기를 정부에 강력히 바란다. 바로 이런 일에서부터 통일이 시작된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 내란의 세계사적 맥락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1.

윤석열 내란의 세계사적 맥락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우리는 ‘멍청함’과 싸워야 한다 [왜냐면] 2.

우리는 ‘멍청함’과 싸워야 한다 [왜냐면]

‘60cm 면도날 철조망’ 세운 경호처…윤석열 오늘은 체포될까 3.

‘60cm 면도날 철조망’ 세운 경호처…윤석열 오늘은 체포될까

[사설] 체포영장 거부하면서 구속영장 응한다는 윤의 궤변 4.

[사설] 체포영장 거부하면서 구속영장 응한다는 윤의 궤변

지리산에서…어제 만난 약초꾼, 오늘 만난 스님 5.

지리산에서…어제 만난 약초꾼, 오늘 만난 스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