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바노조 위원장 “GIRLS Do Not Need A PRINCE” 흰색 티셔츠에 박힌 검은색 문장 하나가 거대기업 넥슨을 흔들었다. 이 티셔츠의 주인공은 바로 성우 김자연씨. 그녀는 넥슨이 신규출시한 게임 클로저스 캐릭터 ‘티나’의 성우였다. 회사는 메갈리아를 후원하는 티셔츠를 입고 인증샷을 개인 트위터에 올린 것을 문제 삼아 김자연씨의 목소리를 게임에서 지워버렸다. 넥슨이 진짜 지우고 싶었던 것은 아마도 ‘왕자님은 필요 없어요’라는 목소리일 것이다. 왕자는 아니지만 왕자가 되고 싶은 소비자가 듣기 전에 말이다. 현실의 권력자들 눈에 민중은 개돼지일지 모르지만, 기업의 입장에서 소비자는 게임 속에서 멋진 왕자가 돼야 한다. 손님은 왕이니깐. 그렇다면 기업은 패션의 자유를 침해한 것일까? 몇 달 전 생전 처음 비행기를 탔을 때 스튜어디스를 본 적이 있다. 출국할 때는 외국계 회사인 델타항공을 타고 귀국할 때는 대한항공을 탔는데, 엄청난 문화충격을 받았다. 델타항공의 노동자들은 몸매와 나이, 머리스타일이 모두 자유로웠다. 마치 그게 뭔 상관이냐고 나에게 되묻는 듯했다. 반면 대한항공의 스튜어디스는 짧은 치마와 한 올의 잔머리도 허용치 않는 머리, 무릎을 꿇는 대화, 밝은 미소를 보여줬다. 물론, 양쪽 노동자의 복장과 내가 필요한 서비스의 내용에는 차이가 없었다. 지난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에 알바노조는 영화관 여성 알바노동자들이 겪는 복장 단속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 이때 노조가 밝힌 것에 따르면 영화관 본사는 알바노동자에게 빨간 립스틱을 바르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붉은 입술 색깔이 손님의 시선을 끌 수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여성노동자는 정해진 일 이외에 독특한 일 하나를 더 하는 것이다. 바로 남성에게 소비되는 일이다. 기업은 패션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 아니라, ‘왕자로부터의 자유, 노동자가 성적 대상이 되지 않을 자유’를 침해했다. 자본가의 욕망과 소비자의 욕망이 만나는 지점, 판매와 구매가 만나는 장소, 이곳은 철저하게 남성의 욕구가 흘러넘치는 저수지다. 이 저수지에 여성의 욕망이 적힌 표지판을 쾅쾅 박아 넣었으니 기업은 신속하게 표지판을 뽑고, 여성노동자를 삭제해버린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윤에 방해가 된다면 기업은 언제든지 노동자의 생각과 사상의 자유를 통제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는 치워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에 노동조합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노동조합이 여성의 차별과 배제의 문제에 무감각하고 여성 조합원을 동등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성노동자에게 노동조합이 또 다른 왕자가 될 위험은 얼마든지 있다. 일터에서 여성은 노동자가 되는 것 자체가 투쟁인 것이다. 노동운동의 목표가 노동자가 자본가의 욕망을 위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주체성을 쟁취하기 위한 것이라면, 노동운동은 여성운동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여성의 주체적인 목소리에 연대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의 인간 되기 투쟁, 노동자 되기 투쟁을 위한 노동운동의 깃발을 들어야 할 때다. 언젠가 노동조합이 다음의 문구가 찍힌 티셔츠를 자신있게 찍어내고, 노동자는 이것을 입고 자유롭게 회사를 돌아다닐 날을 고대해본다. “GIRLS Do Not Need A PRINCE, But We Need U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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