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의 위대한 미국 재건 주장이 지구화 흐름에서 탈락한 쇠락한 공업지대 백인 노동자층의 지지를 얻으며 영향력을 키울 때 그들이 공감하는 위대한 미국이란 인종과 종교를 바탕으로 예외적인 특징을 갖는 미국적 정체성을 다시 회복하는 일을 뜻한다. 미국적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는 이른바 ‘미국의 신조’(American creed)에 대해 시모어 립셋은 자유, 평등, 개인주의, 대중주의, 자유방임주의 등의 특징을 제시한 바 있다. 물론 이 신조들은 건국 초기 기독교와 백인이라는 공통분모를 전제로 형성된 가치들이다. 미국은 ‘언덕 위의 도시’라는 은유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대륙의 예루살렘을 꿈꾸는 종교적 선민의식을 토대로 건설되었으며, 타도해야 할 시간적 타자로서 봉건제의 유산이 없는 상태에서 이민자들인 백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미국적 예외주의의 가장 큰 특징을 이루는 봉건제의 부재는 미국 역사에서 유럽과 달리 곧 사회주의 흐름의 약세나 부재를 가져왔고, 이런 흐름은 다시 미국 사회를 보수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동시에 미국인들이 갖는 선민의식은 미국 외부에 끊임없이 공간적 타자를 설정하고 선악을 구분한 상태에서 선의 대리자인 자신들이 외부의 악을 물리치는 역사를 상정해왔다. 미국의 외교안보 현실에서 이러한 신조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경우는 조지 부시 정권 때 이른바 신보수주의 정책에서다. 패권적 일방주의, 공세적 현실주의, 도덕적 절대주의로 특징지어지는 네오콘의 정책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선악 대결을 분명히 한 ‘악의 축’이나 ‘불량국가’ 등의 개념은 그 기원을 선민의식에 기반해 타자를 규정하는 미국적 정체성의 전통으로 소급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와 백인 중심의 이상적인 미국의 신조는 군나르 뮈르달이 ‘미국의 딜레마’라고 표현했던 현실과 부딪힌다. 즉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관행이 미국의 신조와 동떨어졌음에도 백인 스스로는 미국의 신조를 잘 지키고 있다고 믿는 모순이 미국의 현실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1940년대에 대다수 백인들에게 미국은 유럽보다 훨씬 더 평등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었지만, 흑인들에게 미국은 유럽보다 더 위계적이고 비자유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사회였다. 인종에 따라 두 개의 서로 다른 미국이 존재하는 현실은 최근에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여기에 테러를 계기로 반이슬람 선동이 더해지면서 종교 변수마저 다시 사회갈등의 한복판으로 진입하고 있다. 새뮤얼 헌팅턴은 미국의 이런 흐름을 범세계주의 및 제국주의와 대비되는 국가주의로 분류한 바 있다. 그는 2004년 출판된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책에서 지구적 협약과 규칙들을 존종하는 범세계주의적 흐름과 미국의 힘 및 가치를 전파하는 제국주의적 흐름이 미국 엘리트들 사이에 존재한다면, 미국의 대중들은 히스패닉이나 이슬람의 위협에 맞서 수백년 역사를 갖는 미국적 정체성을 보존하는 고립주의적 흐름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트럼프는 워싱턴의 기득권 세력을 비판하는 시민들의 불만과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미국우선주의 시도를 성공적으로 결합했지만 그가 제시하는 위대한 미국 주장은 무엇보다도 두 개의 미국이라는 현실적인 모순에 답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그는 인종과 종교를 중심으로 배타적인 미국의 정체성 복원을 주장함으로써 미국 내의 갈등을 증폭시키고 미국과 세계 사이의 벽을 높이고 있다. 비록 세계의 절반이 비난할지라도 민주주의와 인권의 확산이라는 범세계주의적 이상을 제시했던 미국의 모습이 신고립주의 흐름 속에서 왜소하고 퇴행적으로 변해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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