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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박근혜 ‘역사 정책’의 의미

등록 2016-09-06 18:14수정 2016-09-06 19:12

박정희 식의 ‘조국 근대화’에 대한 맹목적 긍정 일변도의 태도에서 개인의 생명·건강보다 ‘전체’, 즉 국가와 자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세가 역력히 보인다. 이런 의식의 소유자에게 전시 일본 전체주의의 성노예화 범죄는 진정한 의미의 ‘범죄’로 보일까?

독립보다 자본축적을, 개인보다 국가를, 인간의 존엄성보다 돈뭉치를, 주권과 평화보다 미국에 안보와 외교를 전적으로 맡긴 ‘안정’을 중시하는 박근혜 세력들이 인제 독립운동사로부터 대한민국을 단절시키려는 ‘건국절’을 도입하려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내가 사는 노르웨이와 한국 사이의 한 가지 큰 차이를 자주 실감한다. 노르웨이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역사에 대체로 무관심하다. 2차대전 시절 독일군의 노르웨이 점령 같은 비극적 사건과 일부 노르웨이인의 친독 부역 등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긴 하지만, 현대사 이외에는 대중이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한때 바이킹시대 역사에 대한 민족주의가 섞인 흥미는 존재했지만, 이것도 오래전 일이다. 대중은 주로 현재적 문제에 집중하고, 역사는 거의 전문가에게만 맡겨진다.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나라들은 이와 정반대다. 조상과 그 행적을 중시하고 역사를 현실정치를 위한 ‘거울’로 인식해온 유교적 인식 틀의 영향이기도 하고 제국주의 트라우마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역사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은 다수에게 거의 필수적이다. 언론 등에서 자주 거론돼,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다. 정치권에서는 전통시대 이래 역사는 통치행위의 대상에 속한다. 과거의 공이 있는 신하에게 현재의 임금이, 봉상시 등 국가기관의 도움을 받아 시호를 내리고, 특별히 명현(名賢)이라면 문묘에 배향하곤 했다. 선유(先儒, 과거의 유림)나 선왕 업적 득실에 대한 평가 이상으로 중요한 정치적 의제도 거의 없었다. 과거는, 현재 통치에 필요한 지식과 상징적 자원을 제공해야 했다.

과거를 상대로 하는 통치행위들은 현대에 접어들어서도 계속 이어졌다. 조선의 군주들처럼 대한민국 대통령들은 과거를 현재 정치 명분을 세우기 위한 상징적 자원으로 이용해왔다. 과거를 둘러싼 정치행위는 많은 경우에는 상당한 기만성을 띠고 있었다. 예를 들어서, 이승만 시절에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각종 훈장 추서를 포함한 독립운동가에 대한 서훈은, 박정희 집권기 초기에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윤봉길·이봉창 의사는 바로 그때 서훈된 것이다. 한데 박정희가, 일군 복무 시절에 어쩌면 일본군복을 입었던 본인을 향해 수류탄을 투척할 수도 있었던 항일무장투쟁의 영웅들에게 서훈을 한 이유는 매우 간단했다. 그렇지 않아도 명분이 없는데다가 대일 굴욕외교 등으로 더더욱 정통성을 의심받는 자신의 정권을, 억지로라도 독립운동사와 연결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를 민족투사로 볼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말이다.

이런 배경을 감안하면 박근혜 정권의 ‘역사 정치’를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일단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표리부동의 ‘역사 정책’은, 박근혜 집권기에도 있었다. 2014년에 하얼빈에서 한·중 협력으로 개관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바로 이와 같은 부류에 속한다. 밑에서 볼 것처럼, 박근혜 ‘역사 정책’들을 총체적으로 본다면 박근혜의 사관에서 안중근 의사 같은 독립투사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복절 경축사에서 안중근 의사가 최후를 맞이한 장소마저도 틀리게 이야기한 무지는 전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데 쑨원(손문, 1866~1925)과 량치차오(양계초, 1873~1929) 같은 중국 근대사의 주역들이 깊이 존숭했던 안중근 의사야말로 ‘항일’뿐만 아니고 ‘한·중 우호’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국 재벌들이 대중 무역·투자 없이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시절에 안보를 여전히 미국에 맡긴다 해도 경제 차원에서 중국과 긴밀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기에 하나의 ‘상징적 자원’으로서 안중근 의사가 호명되었던 셈이다.

전통적 ‘항일 사관’을 긍정하는 듯한 ‘역사 정책’이 진행된 것은 주로 박근혜 집권기 초기였다. 그 뒤로 민영화나 반노동 정책 등에 대한 저항이 거세지고 남북관계 경색이 깊어지는 상황에서 박근혜 사관의 실체가 점차 드러나기 시작했다. 비판자에 대한 포섭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확인되고 강경 보수층 결집의 필요성이 제기되니 2015년 말에 나온 것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였다. 국정화 그 자체도 박정희 정권의 전체주의적 교육을 그대로 떠올리게 했지만, 국정화되면서 교과서에는 박정희와 같은 한국계 일제 관료의 행적을 합리화할 수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스며들 것도 국정화를 지지하는 소수 전문가들의 면모를 보면 거의 불 보듯 뻔했다. 박근혜와 그 측근세력들의 사관에는, 안중근 의사가 추구했던 독립의 가치보다 일제의 비호 밑에서 극소수 조선인 관료·부호에게 가능했던 출세나 자본축적이 더 중시된다는 것은, 국정화 논란에서 명확히 확인됐다. 이후의 ‘역사 정책’들은 박근혜 사관의 사회·정치·외교적 함의를 좀더 구체적으로 나타냈다.

2015년 12월28일에 한·일 간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피해 당사자들의 의견을 묻지도 않은 채, 인제 소송으로까지 간 피해 당사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국 강경보수 정권 사이에서 맺어진 ‘합의’다. 재무장을 획책하고 있는 현재 일본 정권은, 이 ‘합의’에서 얻고자 했던 바를 다 얻었다. 성노예화 범죄에 대한 국가의 책임 인정을 성공적으로 회피했으며, 보상 내지 배상 대신 사실상 일종의 ‘입막음 돈’ 성격의 ‘치유금’ 10억엔을 내준다고 해서 ‘도덕적 우위’까지 차지한다고 자긍하며 ‘역사 문제’의 부담 없이 ‘보통국가화’, 즉 재무장 프로젝트 진행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위안부 피해 역사까지 팔아먹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다수의 한국인이 반대하는 굴욕 협정을 맺으면서까지 박근혜 정권이 아베 신조 정권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속사정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첫째, 박근혜와 그 측근세력들의 사관은 본질상 전체주의적이다. 개인이 입는 트라우마나 피해를 경시하는 이 사관의 중심에 하나의 기본축으로서 ‘국가’가 자리잡고 있다. 수많은 고문 피해자, 간첩 조작 피해자, 산재 사망자, 산재 피해자 등을 죽이거나 장애인으로 만든 박정희 식의 ‘조국 근대화’에 대한 맹목적 긍정 일변도의 태도에서 개인의 생명·건강보다 ‘전체’, 즉 국가와 자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세가 역력히 보인다. 이런 의식의 소유자에게는 전시 일본 전체주의의 성노예화 범죄는 과연 진정한 의미의 ‘범죄’로 보일까? 개체가 전체를 위해서 희생돼야 한다는 논리로 ‘이해해주지’ 못할 국가범죄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무엇이든 ‘돈’으로 재는 극히 자본주의적인 사고도 겹친다. 피해 노동자에게 합의금 얼마를 주기만 하면 자본의 모든 범행이 다 면죄되는 현실에 익숙해진 오늘날 한국 집권세력 같은 인간들에게는 아마도 ‘10억엔 지급’은 정말 ‘문제의 해결’로 보일지도 모른다.

둘째, “위안부 문제의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은 사실상 일본군에 대한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면죄부를 의미하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앞으로의 한·일 간 ‘군사 협력’, 즉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미·일·한 삼각동맹의 강화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다. ‘12·28 합의’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에서 확인되듯이, 중국에 대한 포위망을 강화하려는 미국은 현재로서 한국이 더 명확하게 미·일·한 공동 군사체계에 편입되는 것을 강하게 소망하고, 박근혜 정권은 -한·중 경제 관계의 미래와 전장화할지도 모를 한반도 전체의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면서도- 이와 같은 압력에 대한 하등의 저항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12·28 합의와 같은 ‘역사 정책’은 바로 ‘사드 배치’로 상징되는, 한반도 평화를 희생시킬 가능성이 큰 무비판적 종미(從美) 연일(聯日) 군사 정책의 전주곡이었다.

독립보다 자본축적을, 개인보다 국가를, 인간의 존엄성보다 돈뭉치를, 그리고 주권과 평화보다 미국에 안보와 외교를 전적으로 맡긴 ‘안정’을 더 중시하는 박근혜 세력들이 인제 독립운동사로부터 대한민국을 단절시키려는 ‘건국절’을 도입하려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말을 어떻게 해도, 속으로 저들은 지금도 독립운동가들을 저들의 안락을 위협하는 ‘불령선인’으로 볼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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