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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 온 뒤 무지개] 지금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것

등록 2016-09-21 18:19수정 2016-09-21 20:15

대한민국에서 벌써 몇년째 인권이나 평등, 차별에 관한 그 어떤 법률이나 조례, 하다못해 상징적인 선언이나 헌장조차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 근거한 인권 조례들은 모두 동성애를 옹호할 위험이 있다며 원천봉쇄 대상이다.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지금 한국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무엇일까. 사드? 핵폭탄? 지진? 정부의 무능함과 부패? 우열을 가리기도 힘든 와중에 놀랍게도 평등과 인권이 가장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눈치챘는가? 벌써 몇 년째 대한민국에서 인권이나 평등, 차별에 관한 그 어떤 법률이나 조례, 하다못해 상징적인 선언이나 헌장조차도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지난달, 서울 광진구청은 ‘인권 보장 및 증진 조례’를 입법 예고하자마자 항의에 시달렸다. ‘성적 지향’이란 단어가 조례에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구청에서 즉각 삭제하겠다고 밝혔지만 조례 폐기 운동은 이어지고 있다. 일단 만들고 나중에 은근슬쩍 개정해 ‘성적 지향’을 다시 넣을까봐가 이유다. 안산시가 준비 중인 인권조례엔 애당초 성적 지향이 없었다. 그래도 인권의 범위를 확대 해석해서 적용할 가능성이 있다며 철회하란 민원이 몰린다. 인천시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국가인권위원회법에 근거한 인권 조례는 모두 동성애를 옹호할 위험이 있다며 원천봉쇄 대상이다.

조례만이 아니다. 국회에서 발의한 ‘한부모가족지원법’도 공격받았다. 명분은 법안의 ‘다양한 가족’이란 문구가 전통적인 가족 제도를 타파할 목적으로 서구의 급진 페미니스트와 동성애자들이 만들어낸 용어라는 것이다. 이해 불가한 비판이지만 해당 문구는 결국 법안에서 지워졌다. 남인순 의원의 ‘가족지원기본법’도 가족의 정의를 넓히면 동성애 커플을 용인한다는 우려로 제정되지 못했다. 동거나 사실혼 관계를 위한 진선미 의원의 ‘생활동반자에 관한 법안’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동성 결혼을 인정하는 우회 전략이라며 엄청난 항의에 시달렸다. 유승민 의원의 ‘인권교육지원법’도 같은 꼴을 당했다. 법안의 취지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구현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이바지’하는 것일 뿐임에도 단지 인권교육의 총괄을 국가인권위원회가 맡으면 동성애 조장 교육을 할 것이라는 ‘추측’에 의해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역시 자진철회 되었다.

성평등 조례 쪽도 만만치 않다. 기존의 ‘여성발전기본 조례’를 시대에 맞게 ‘성평등 조례’로 개정하는 전국적인 움직임은 2011년부터 있었다. 그러나 대전시는 조례에 성적소수자의 인권을 명시했다가 집중포화를 맞았다. 관련 조항은 모두 삭제되고 조례명도 ‘양성평등기본조례’로 바뀌었다. 성평등이란 단어는 동성애자나 트랜스젠더까지 포함하는 뉘앙스가 있다는 지적 때문이다. 이뿐이랴. 서울시 구로구의 양성평등 조례는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에 근거한 차별을 금지하려다 수난을 겪었다. 사회적 성을 인정하면 서구 퇴폐 성문화에 빠지게 된다는 비난에 마침내 ‘사회적 성’만 삭제되었다. 심지어 성적소수자에 관한 조항이 전혀 없는 청주시 양성평등 조례도 비판받았다. 성차별이란 단어가 악용될 수 있으니 ‘양성차별’로 바꾸고, 성주류화나 성인지 예산 배정 등은 사회주의자 페미니스트들이 남성들을 매장시키기 위해 만든 술책이니 지우라는 것이었다. 반동성애는 이렇게 여성 혐오, 빨갱이 혐오와 매끄럽게 연결된다.

얼마 전 충북교육청에서 제정하려 한 ‘교육공동체권리선언’을 둘러싼 논란도 기막히다. 학생들의 권리만 부각한 듯 보인다 하여 명칭에서 ‘권리’가 빠지고, 동성애 옹호법이란 의심을 피하고자 국가인권위원회법을 참조한 선언의 부록이 전면 삭제되었다. 돌이켜보면 ‘서울시민인권헌장’의 제정도 무산되었다. 차별금지법이 벌써 10년째 제정되지 못하는 이유도, 서울과 광주의 학생인권조례를 새삼 폐지하라는 명분도 모두 같다. 거짓말도 반복하면 믿게 된다고, 종북 좌파가 동성애를 조장해 나라를 망하게 하려는 음모라고 믿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모든 반대 운동은 소위 애국시민단체와 나라를 걱정한다는 학부모단체, 그리고 보수적인 종교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언론에 보도되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가는 일들이다. 이 모든 것이 농담이면 좋겠다. 원자력발전소를 밀집시켜놓고 이제 와 활성 단층이 있는 지진 위험 지역이라는 뉴스를 듣는 마음처럼 말이다. 재난 영화에서 주인공이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힘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믿음이 아니던가.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끼리 인간의 존엄성과 사랑을 지키는 일이 좀처럼 중요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무섭다. 인권과 평등이 멈춰버린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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