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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저신뢰 사회, 대한민국

등록 2016-10-04 18:22수정 2016-10-04 18:58

권위주의 시절 교장이 불량학생들에게 훈화하듯이 ‘국민들과의 소통’을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스타일을 한 번 보라. 아니면, 거의 적군을 상대로 하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면서 집회·시위 참가자를 대하는 경찰들의 태도를 보라. 아무리 대통령 직선제나 대의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 있어도, 민주국가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장면들이다.

아무런 폭력적 행위도 저지르고 있지 않았던 백남기 농민을 물대포로 쓰러뜨려 결국 죽게 만든 것은 과잉진압이며 국가에 의한 민간인 살인이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하다. 한데 이 참극의 총책임자였던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사과를 거부하면서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해서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는 것으로 그 책임추궁이 끝나고 만 것이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인간에게 행복이란 무엇일까? 배고프고 머물 곳이 없고 입을 옷이 모자라는 사람에게는 의식주 문제 해결이 행복이겠지만, 어느 정도 기본 욕구들이 충족되고 나면 더 이상의 소비가 반드시 더 이상의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하루 칼로리 소비량이 정해져 있고, 몸이 하나밖에 없는 인간은, 과연 수면 시간을 제외한 하루 동안 얼마나 먹고 마시고 입고 쓰고 즐길 수 있겠는가? 의식주가 해결되고 나면, 인간에게 행복의 원천이란 대인·대사회적 관계다. 그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1인당 소득이 10만달러가 되어도 현재의 불행감은 그대로일 것이다.

나는 언제 행복감을 느끼는가? 가장 행복한 순간 중의 하나는, 외출시 집 출입문을 잠그지 않고 나가는 것이다. 직장에 가는 경우라면 잠그고 가야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정도 집을 비울 때에 굳이 그런 필요를 못 느낀다. 노르웨이가 복지국가인 만큼 범죄율은 저조하고, 나는 내 지역에서 사는 나의 이웃을 충분히 믿기에 굳이 누군가의 범의를 의심하여 문을 잠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웃을 믿고 살 수 있다는 느낌이야말로 행복감이다. 또 한 가지 내 일상의 행복한 측면은, 14살이 된 장남이 비록 밤 11시에 귀가해도 별다른 걱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다. 그만큼 그와 같이 노는 친구들이나, 동네의 전체적인 풍토를 신뢰한다. 에스엔에스 중독이나 독서문화의 퇴락 등 문제들은 있어도, 폭력이 그다지 없는 것을 신뢰한다. 이 신뢰야말로 참 행복한 느낌이다. 인간이 본래 군중 동물인 만큼, 본능적으로 타자들을 믿고 살고 싶어한다. 그렇게 살 수 없는 사회야말로 요즘 잘 쓰이는 말로 ‘헬’(지옥)이다.

한국 사회의 신뢰도는 과연 어느 정도인가? 한국에서 3년간 직장에 다니면서 살고, 지난 16년 동안 해외 교민사회를 관찰해온 나의 결론은, ‘인연’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신뢰도가 구미권과 대략 같거나 오히려 더 높다는 것이다. 깊은 관계가 있는 ‘인연’이 아니고 어느 정도 낯익은 단골고객이나 지인이라 해도, 한국인들은 누구와도 다르지 않게 기본적으로 타인을 믿어준다. 문제는 ‘생판 모르는 타인들’에 대한 신뢰도다.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대체로 믿어주는 분위기가 강한 스칸디나비아와 달리 한국에서는 경각심이 출발점이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현재 한국 도시민들이 1세나 2세 도시인들이고, 아직까지 마을 바깥사람들을 믿지 않는 폐쇄적인 시골의 사고방식이 그들에게 잔존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이 가설을 믿지 않는다. 도시화가 대체로 전후에 이루어진 것은 노르웨이나 핀란드도 마찬가지인데, 과연 그 결과는 왜 이렇게도 다를까? 문제는 ‘전통’이라기보다는 사회생활을 규정하는 권력이라는 기본틀과 권력자, 그리고 사회시스템 전체에 대한 다수의 신뢰수준이다. 대체로 권력기구, 사회시스템에 대한 신뢰도는 전체적 사회 신뢰도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권력에 대한 신뢰도야말로 한국 사회에서 최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통계에 의하면, 정부를 믿어주는 사람은 한국에서 34%에 불과하다. 아무리 재벌들이 부유해지고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부국 대열에 낄까 말까 한다 해도 정부 신뢰도는 크게 오르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보다 생활수준이 더 낮은 인도(73%)나 러시아(64%)보다 한국에서의 정부 신뢰도가 훨씬 떨어지는 것이다. 정부뿐인가? 사법제도를 신뢰해주는 한국인은 아예 27%밖에 없다. 반대로 노르웨이에서는 83%가, 한국과 비슷한 제도적 유산을 안고 있는 일본에서마저도 65%가 사법제도를 신뢰한다. 각종 권력에 대한 불신은 젊을수록 더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한 조사에 의하면, 35살 미만 응답자들 중에서는 뉴스를 신뢰하는 사람은 아예 10%에 불과하다. 한 보수 일간지가 설문조사한 중고생 129명 중에서는 86명이 정당 소속과 무관하게 ‘모든’ 정치인들을 불신했다. 이외에 젊은이들이 가장 불신하는 직군은 검찰과 경찰, 군인, 기업인, 교수 등으로 나타났다. 한국 사회의 여러 권력조직을 보는 젊은층의 눈은 이런 것이다.

시민들이 권력을 원천적으로 불신하면, 이는 시민의 탓일 리가 없다. “대통령 모독이 도를 넘었다”고, 권위주의 시절 교장이 불량학생들에게 훈화하듯이 ‘국민들과의 소통’을 하는 박근혜 대통령의 스타일을 한 번 보라. 아니면, 거의 적군을 상대로 하는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면서 집회·시위 참가자를 대하는 경찰들의 태도를 보라. 아무리 대통령 직선제나 대의민주주의가 형식적으로 있어도, 민주국가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정도의 장면들이다. 권력자들이 시민들을 점령군처럼 지배·통제하다시피 하면서 거기에다가 저들의 행동이 인명 상실로 귀결돼도 제대로 책임지는 일이 없다. 무책임이야말로 한국 권력층의 가장 큰 특징일 것이다.

2010년대를 대표할 초대형 참사인 세월호 침몰 관련 재판과 징계 결과를 보자. 공판 결과, 침몰에 책임 있는 민간인들 중에서는 37명이나 실형을 받은 반면, 공직자들 중에서는 금고형 이상의 실형을 받게 된 자는 오직 6명이며 그들은 전부 하급 공무원이었다. ‘깃털’들은 처벌받지만 ‘몸통’은 그대로 건재한다는 것은 세월호 재판에 대한 세인들의 평이었다. 사실, 처벌이나 징계를 받은 책임자보다 끝내 그 자리에 남은 책임자는 더 많았다. 세월호 참사에 책임이 있다고 감사원이 지목한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 인천지방해양항만청, 한국선급 소속 34명 가운데 29명이 그대로 공직에 남은 것이다. 침몰 당시에는 그 존재를 나타내지도 않은 대통령이나 정부 각료의 책임을 제대로 물은 일도 없었다. 도대체 이런 권력자들을 믿고 살 바보들이 어디에 있겠는가?

세월호뿐인가?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뒤의 그 어떤 인명 상실을 부른 참사를 봐도 피해자는 있으나 정부나 공무원 조직 안에서 책임자는 없다. 며칠 전에 긴 고통 끝에 유명을 달리하게 된 백남기 농민의 경우를 보라. 아무런 폭력적 행위도 저지르고 있지 않았던 그를 물대포로 쓰러뜨려 결국 죽게 만든 것은 과잉진압이며 국가에 의한 민간인 살인이라는 사실은 불 보듯 뻔하다. 한데 이 참극의 총책임자였던 강신명 전 경찰청장은, 피해자 유족들에게 사과를 거부하면서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해서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는 것으로 그 책임추궁이 끝나고 만 것이다. 국가에 의한 시민 살인의 책임자가 이 정도 뻔뻔스러울 수 있는 형식상의 민주주의 국가는 과연 한국 이외에 더 있는가?

정치, 행정, 사법 권력의 무책임은 가장 돋보이지만, 이외의 권력집단들을 봐도 그 행태는 거의 차이 없다. 언론을 봐도, ‘기레기’ 같은 말들을 왜 이토록 많은 한국인들이 쓰는지 쉽게 알겠다. 중요한 사건이 나면 ‘주류’ 언론의 보도를 그대로 믿을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긴급 보도인지라 어쩌면 오보가 날 수도 있다는 것까지 이해해도, 그다음 정정보도나 사과도 없기 때문에 언론 공신력은 바닥에 떨어지게 된다. 예를 들어 3년 전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을 생각해보자. 당국의 발표가 나자마자 보수 언론들이 이를 받아쓰기해서, 당국의 모든 주장이 사실인 것처럼 보도했다. 이석기 등이 북한과 연계된 ‘혁명조직의 수괴’처럼 그려지고, 이들이 모여서 폭동과 시설물 습격 등 ‘내란’을 음모한 것처럼 소설을 썼다. 결국 재판에서 북한과의 연계도 ‘혁명조직’도 ‘내란음모’도 다 무죄로 나왔는데, 오보를 사과한 신문은 한 군데라도 있는가?

저(低)복지의 정글자본주의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점령군처럼 행동하고 무책임한 권력조직들은 한국을 인간으로서 살아나가기 어려운 저(低)신뢰 사회로 만든다. 시민들이 스스로 ‘피통치민’으로서의 위치를 거부하며 대대적인 행동에 나서지 않는 이상 이런 상황은 지속될 것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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