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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 온 뒤 무지개] 자궁은 국가의 것인가

등록 2016-10-19 18:02수정 2016-10-19 20:19

군사 정권에는 경제 개발이 중요했고, 인구 증가는 걸림돌이었다. ‘산아 제한’ 정책은 ‘가족계획’으로 포장되었다. 임신 중절을 늘리기 위해 1973년에 모자보건법을 제정한다. 1980년대 캠페인 구호는 ‘늘어나는 인구만큼 줄어드는 복지후생’이었다. 정책 방향이 바뀐 것은 1996년 이후였다. 출산율이 심각하게 떨어지자 ‘낙태’에 대한 문화적, 사회적 낙인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한채윤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보건복지부가 처음엔 기특한 생각을 했다. 주사기 재사용으로 인한 C형 감염 전파, 대리 수술 등의 잘못된 의료 행위를 막겠다며 ‘의료관계 행정처분규칙’의 개정안을 내놓았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유통 기한이 지난 의약품과 주사기 재사용 금지, 의사들의 성폭력 등을 열거한 비도덕적 의료 행위 목록에 뜬금없이 ‘임신 중절 수술’을 포함시킨 것이다. 환자들에게 안전한 의료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라는 입법 취지와 완전히 다른 이슈를 욱여넣은 셈이다. ‘저출산’을 국가의 비상사태로 인식하고 대책을 마련하라는 대통령의 말씀에 영향을 받아 뭐라도 해보려 한 것일까?

대한산부인과의사회의 반발도 처음엔 당연했다. 형법과 모자보건법 내에 이미 임신 중절과 관련한 의료인의 처벌이 규정되어 있기에 과잉 처벌이 우려되었다. 하지만 해결책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산부인과의사회는 11월2일부터 모든 병원에서 임신 중절 수술을 거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임부의 생명이 오갈 수도 있는 사안을 의사들이 정부와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카드로 던진 것이다. 작금의 사태에서 여성의 자궁은 국가의 관리 대상이고, 임부의 몸은 거래 대상임이 드러났다. 이에 ‘나의 자궁은 나의 것’이란 시위가 조직되었다. 그리고 ‘낙태’를 형법상의 ‘범죄’로 규정하는 것이 타당한가라는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다.

한국 근대사를 간단히 보자. 20세기 초의 일본은 전쟁을 치르기 위해 인구 증가를 꾀했다. 이때 낙태금지법이 만들어진다. 그 영향 속에서 한국은 해방 후에도 낙태죄를 존속시킨다. 1961년에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 정권에는 경제 개발이 중요했고, 인구 증가는 도리어 걸림돌이었다. ‘산아 제한’ 정책은 ‘가족계획’으로 포장되었다. 가족의 삶이 아니라 가족의 수를 정하는 것이 곧 가족계획이었다. 유신 체제로 접어들자 임신 중절을 늘리기 위해 1973년에 모자보건법을 제정한다. 이제 ‘가족의 수’는 곧 보건 수준이자 삶의 질의 문제가 되었다. 1980년대의 캠페인 구호는 ‘늘어나는 인구만큼 줄어드는 복지후생’이었다. 심지어 소록도의 한센인들은 강제 낙태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정부의 정책 방향이 바뀐 것은 1996년 이후였다. 출산율이 심각하게 떨어지자 모자보건법이 허용하는 수술 범위를 축소했고, ‘낙태’에 대한 문화적, 사회적 낙인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임신 중절은 늘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지만 쉽게 말하여지진 않았다. 낙태죄는 모든 것을 불법으로 만들고 임부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임신의 공동 책임이 있어도 남성은 낙태죄에서 결코 주범이 되지 않는다. 남성이 출산을 원할 땐 여성은 고발당할 수 있고, 남성이 출산을 원하지 않으면 여성에겐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하는 부담이 남는다. 수술의 부작용도, 낙태의 죄책감도, 사회적 비난과 처벌도 오로지 임부의 몫이다. 그런데도 낙태 논의에는 ‘생명 경시 풍조’와 ‘생명 윤리’가 등장한다. 하지만 정신차려 보자. 가습기 살균제의 위험성을 숨기고 물건을 팔아도 수천명의 ‘생명권’을 침해한 문제로 다루지 않았다. 300여명이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배와 함께 깊은 바닷속에 잠길 수밖에 없었던 참사도 그런 관점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나라에서 임신 중지가 곧 태아 살해라고 비난하는 것이 어떤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가! 혹자는 낙태죄가 없어지면 낙태가 늘어날까봐 반대하지만 처벌받을까에 대한 두려움이 임신을 중단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절박함을 뛰어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혹자는 종교 교리에 근거해 반대한다. 신앙을 지키는 일은 신의 뜻을 따르는 것이겠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형법을 교리에 맞춰 제정하는 것은 같은 차원의 일이 아니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면 먼저 임부와 태아의 생명값을 경합시키는 것부터 중단해야 한다. 이는 임부의 인권과 국가 폭력의 경합이며 싸움이다.

지난 10월10일은 정부가 정한 임산부의 날이었다. 국가기록원은 풍요와 수확의 달인 10월과 임신 기간인 10개월을 의미해서 정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과연 누구를 위한 풍요이며 무엇을 수확한다는 것일까? 역사는 폴란드와 한국에서 낙태죄 폐지를 크게 외친 올해의 10월을 기억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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