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연구자 며칠 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배우 메릴 스트립의 수상소감을 보다 울컥했다. 그 6분짜리 소감은 여기 그대로 가져오고 싶을 정도로 내용과 형식 모두 완벽했다. 그녀는 존중감과 친근감을 가지고 ‘이민자’의 역사를 공유하는 동료 배우 한 명 한 명의 출신과 이력을 언급했다. 할리우드에서 외국인을 내쫓으면 우리는 미식축구나 종합격투기 같은, ‘예술’ 아닌 것들만 봐야 한다는 대목에서 모든 참석자들은 박수쳤다. 대선 당시 한 장애인 기자를 흉내 냈던 트럼프를 비판할 때도 그녀는 우아했다. 그녀가 지적한 것은, ‘공적 혐오발화’는 다른 사회구성원들 역시 그렇게 해도 좋다는 승인의 신호라는 점이었다. 그녀의 연설은 대본 없이는 단 한마디도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는, 혹은 ‘이, 그, 저’와 같은 지시대명사로 점철된 모호한 문장을 즐기는 대통령의 연설만 들어온 내게 정말 놀라웠다. 물론 안다. 메릴 스트립의 연설이 준 감동의 일부는 그녀가 백인 여성이자 대배우로서 지닌 안정적인 계급, 경력, 사회적 지위, 그리고 오랫동안 축적돼온 미국 연설문화에 기인한 것이라는 걸. 그러나 그럼에도 이 연설의 아름다움은 덜해지지 않는다. 한 업계에서 상징적 지위를 지닌 인물이 공적 자리에서 자유와 평등, 다양성과 이질성의 가치, 반폭력과 민주주의를 말하고 그에 책임지는 삶을 산다는 것. 여기서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은, 적어도 우리가 배워온 민주적 가치들은 여전히 ‘글로벌 스탠더드’이며, 이것이 무너지지 않고 통용되는 세계가 아직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국에도 ‘글로벌 스탠더드’적 문제의식과 감수성을 정치적 자원으로 삼은 인물이 나타났다. 반기문. 그는 어린이가 읽는 위인전의 주인공이자, 한류 스타를 꿈꾸는 10대 연예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가 대선 출마를 암시하며 귀국해 보여준 행보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민생친화’ 퍼포먼스를 위해 서울역의 노숙인들을 내쫓고, 공항철도 매표기에 지폐를 겹쳐 넣는 모습, 편의점에 들러 고가의 수입 생수를 집는 모습은 그저 실소의 대상인가. 평생 성소수자의 인권 향상에 힘썼다면서도 정작 한국에서는 ‘나는 동성애옹호자가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발신하는 건 또 뭔가. 한국에서 대통령이 되려면 ‘위선’으로라도 민주적 가치를 강조하는 것보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제스처를 취하는 게 전략적으로 더 유리하다는 걸 그는 잘 아는 것 같다. 그뿐인가. 한 인터뷰에서 그는 한국 대선의 시대정신을 “대타협”이라고 말하며, “노동계도 특권층이 있다”, “귀족 노동자”, “자기 주장만 계속하면서 거리로 뛰쳐나와 억지”를 쓰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게 정말 전임 유엔 사무총장의 말인가. 대체 이 상황들 중 어디서 우리가 기대한 ‘글로벌 스탠더드’를 찾을 수 있는가. 이 모든 건 지극히 ‘한국적’이다. 반기문이 촛불정국이 낳은 ‘새로운 리더’일 수 있을까. 그의 정치적 약점은 그가 생각하듯 ‘국내정치 경험 부족’이 아닐지도 모른다. 유엔, 거기 값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시대정신이 그에게 정말 있는지 묻고 싶다. 그가 국내 상황을 잘 모른다고 고백했기에 적어두자면, 서울시에는 만 65살 이상 노인의 지하철 무임승차를 지원하는 ‘어르신 교통카드’ 제도가 있다. 고국의 산천을 벗 삼아 평화롭고 지혜롭게 노년을 보내시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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