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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아침 햇발] 이재용에겐 ‘다행’, 삼성엔 ‘불행’

등록 2017-01-19 18:12수정 2017-01-19 20:32

안재승
논설위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할아버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는 ‘5·16 군사 쿠데타’ 소식을 일본 도쿄 제국호텔에서 들었다. ‘부정축재자 1호’로 지목돼 귀국하면 바로 구속될 처지였던 그는 부정축재 재산 모두를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어 귀국하자마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나 협조를 약속하고 구속을 피했다. 그때 만들어진 게 전국경제인연합회의 전신인 한국경제인협회다. 1966년 이병철 창업주는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면서 다시 위기를 맞았으나 또 구속을 피했고, 대신 차남인 이창희 한국비료 상무가 감옥에 갔다. 그는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비료의 국가 헌납과 경영 일선 퇴진을 약속했다. 하지만 17개월 뒤 경영 위기를 명분으로 내세워 다시 회장에 복귀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아버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2년 뒤 사면됐다. 2007년 10월엔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 김용철 변호사가 ‘이건희 비자금과 정·관계 로비 의혹’을 폭로했고, 조준웅 변호사가 ‘삼성 특검’으로 임명됐다. 그러나 삼성 특검은 수사 기간 내내 이 회장에 대한 불구속 방침을 밝히는 등 ‘봐주기 수사’를 했다. 법원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 엄정해야 할 특검의 수사와 재판이 되레 삼성의 불법 경영권 승계에 대해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회장은 2008년 4월 특검 수사 발표 직후 자신을 포함한 총수 일가의 경영 일선 퇴진, 전략기획실 해체, 1조원의 사재 출연 등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2009년 12월 말 이례적인 단독 특별사면을 받아 삼성전자 회장으로 복귀했고 전략기획실도 미래전략실로 이름을 바꿔 부활했다. 1조원의 사재 출연 약속은 지금까지도 지켜지지 않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된 19일 한 시민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 앞에 응원 게시판을 설치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특검을 격려하는 내용의 쪽지를 붙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기각된 19일 한 시민이 서울 강남구 대치동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 앞에 응원 게시판을 설치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특검을 격려하는 내용의 쪽지를 붙이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이 19일 새벽 기각됐다. 433억원의 뇌물 공여, 97억원의 횡령, 국회 청문회에서의 위증 등 혐의의 중대성을 고려할 때 3대에 걸친 삼성 총수 가운데 첫 구속자가 나올 가능성이 큰 것으로 관측됐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구속영장 기각 직후 삼성은 “불구속 상태에서 진실을 가릴 수 있게 돼 다행”이라는 공식 입장을 내놨다. 과연 다행일까? 한겨울을 구치소에서 보내야 할 상황을 피하게 된 이 부회장에겐 다행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재용이 곧 삼성이 아닐진대 삼성에도 다행일 수 있을까? 구속영장 기각이 삼성에 대한 비판 여론에 기름을 끼얹은 꼴이 됐다. “박근혜도 최순실도 허수아비, 삼성이 대한민국 권력서열 1위” “진정한 법꾸라지 삼성” “돈이 실력임을 입증한 사법부” 등 비판과 함께 “박영수 특검 힘내라!” “촛불 시민 모여라, 국민은 끝까지 간다!” 등 응원이 쏟아지고 있다. ‘이재용 구속 → 삼성 경영 위기 → 한국 경제 위기’라는 흘러간 노래가 적어도 국민에게는 통하지 않은 것이다. 삼성은 이제 국민한테 사랑과 존경을 받는 기업이 되겠다는 꿈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만약 이병철 창업주나 이건희 회장이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상응하는 처벌을 제대로 받고 대국민 약속을 지켰다면 삼성이 또다시 ‘부도덕한 기업’으로 낙인찍히는 상황이 벌어졌을까? 최소한 이건희 회장이 10년 전 눈물을 글썽이며 약속한 지배구조 개선을 실행했다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이렇게까지 휘말렸을까? 아마도 삼성은 조만간 또 대국민 사과와 경영 쇄신안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을 믿을 국민은 거의 없을 듯하다.

js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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