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당 학과나 단과대학의 ‘실세’로 통하는 ‘실력자’가, 취직 추천권이나 교원 임용권 등을 무기로 삼아 아예 대학원생이나 소장학자를 21세기판 노예로 만든다. 극단적 선택을 해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도 대학에서의 사적 착취나 대필 강요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공적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대학가 소왕국들을 본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피해자들의 연대와 투쟁뿐이다. 착취자들의 소행을 공개하고 같이 집단적 대응에 나서는 것부터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대학가는 긍정적 의미의 ‘문화혁명’을 필요로 한다. 일상적 갑질의 모든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에게 당당하게 함께 “노”라고 하며, 대학 운영의 민주화와 인권·노동권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그런 혁명 말이다.
최근에 한 번 인생에서 흔치 않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국정 한국사 교과서의 집필자 실명들이 공개됐을 때 그중에서 한 이름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트라우마의 기억으로 손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18년 전에 나와 너무나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 바로 그 사람! 그 이름을 보자마자 그 당시 일이 머리에 다시 떠올랐다.
그때 나는 국내의 한 사립대학에서 계약직으로 교편을 잡았다. 임금이라고 해봐야 제조업 근로자의 평균 임금에도 미달했다. 궁여지책으로 다른 대학에 출강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한·러 통번역 일을 가끔 맡았다. 그중의 하나는 바로 모 연구소가 의뢰한 한 사학자의 교과서 번역이었다. 서면계약은 없었고, 그걸 요구하기도 심적으로 힘들었다. 내 주위에 이런 일을 맡아 하는 비정규직 중에서 서면계약까지 챙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요구해도 되는가”라고 계속 망설이다 끝내 포기했다. 약속한 대금은 백만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약 석달 정도 소요된, 역사 용어 때문에 무척 까다로운 번역 작업을 고려하면 그다지 후하지 않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한달 월급의 60%에 해당되는 액수이기에 나로서는 ‘거액’이었다. 더군다나 그중 절반은 발주와 함께 선불금 형태로 지급돼 고마울 따름이었다.
문제는 남은 반액이었다. 일을 다 끝내고 번역본을 들고 갔을 때 나는 그 교과서를 집필한 사학자로부터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번역 사업이 어떤 프로젝트 자금 지원을 받기로 했는데, 그 프로젝트가 중단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일을 다 해내도 나에게 줄 돈이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당황한 기색을 보이자 교과서의 저자는 일단 원고에 대한 감수 등 출판 준비부터 하라고 이야기했다. 출판을 하고 나서 돈을 어떻게든 마련해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당시 내 기분은 당황 그 자체였다. 번역만 끝내면 돈을 지급하겠다는 애당초의 약속을 교과서의 저자가 지키려 하지 않았기에 “먼저 출판 준비 해놓으면 그다음에 돈을 찾아보겠다”는 약속도 믿기가 어려웠다. 이럴 때에 어떤 공적 절차를 밟아 미수금을 받아낼 수 있는지가, 나에게 그저 커다란 수수께끼였다. 일단 노동을 해놓고서 노임을 받지 못한 셈이었으니까 이 일을 처리해야 하는 기관은 아마도 노동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부에 전화해서 “한국에서 체류하는 외국인 계약직 교원노동자다. 번역일을 하고 대금 체불을 당했는데, 이런 일을 담당하시는 분을 바꾸어달라”고 했다. 한데 내 전화를 받은 담당 직원은 나에게 “야, 나 너 한국말 못 알아들어. 돈을 못 받았다는 공장의 이름부터 똑똑히 다시 발음해봐”라고 반말로 응대한 다음 바로 전화를 끊고 말았다. 번역일을 의뢰한 연구소 소장에게 전화해서 “미수금을 지급해달라, 그렇지 않으면 법적 절차를 밟겠다”고 말했지만, 돌아온 것은 글로 옮기기 어려운 욕설들과 “협박, 공갈죄로 고소하겠다”는 이야기였다. 법적 절차를 언급하는 것이 대한민국에서 “협박”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법적 절차를 밟고 싶어도, 서면계약이 없는 상태에서 쉽지 않았다. 결국 번역 대금의 잔액을 받지 못한 채 외국에서 직장을 잡아 출국하게 됐지만, 더 큰 충격은 그다음이었다. 몇 년 뒤에 러시아에 가게 됐는데, 그곳의 한 학술서점에서 바로 내가 번역한 그 교과서를 판매대에서 발견했다. 한데 놀랍게도 표지에 나오는 번역자의 이름은 내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의 이름이었다. 나 대신에 출판 준비를 해준 그에게 번역물에 대한 저작권마저도 넘어간 셈이었다. 내가 그 교과서 번역본 표지에서 그의 이름을 보자마자 머릿속에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러면 그 사람이라도 노동의 대가를 과연 정당하게 받았을까”라는 우려였다. 이렇게 해서 석달에 걸친 노동의 결과물에 대한 권리를 박탈당하게 됐는데, 이러한 명백한 연구윤리 위반에 대해서 호소할 수 있는 기관이라고는, 문제의 교과서 저자가 재직하는 학교에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그 당시에도 각종 ‘실력자’에 의한 약자 권리 침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관이나 절차의 부재가 한국 대학 내지 학계의 엄청난 문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문제의 규모는, 그 당시의 나의 생각에 비해서 훨씬 더 크다.
사실 내가 당한 노동권 및 저작권 침해는, 한국 대학의 실태로서는 극히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정말 심각한 경우에는 해당 학과나 단과대학의 ‘실세’로 통하는 ‘실력자’가, 취직 추천권이나 교원 임용권 등을 무기로 삼아 아예 대학원생이나 소장학자를 21세기판 노예로 만든다. 이런 관계가 폭력적 양상을 띨 경우 가끔 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거의 사적 노예처럼 부린 ‘제자’에게 인분까지 강제로 먹인 그 악명의 ‘인분교수’는 결국 2심에서 8년형을 선고받고 말았다. 하지만 물리적 폭력이 아닌 심적 강제나 강요에 의한 사적 착취의 경우에는 유죄판결을 찾기가 힘들다. 2010년에 해당 대학에서 “힘께나 쓰는” 지도교수를 위해 논문을 54편이나 대필해야 했던, 그러나 끝내 애당초의 약속과 달리 교수 임용에서 제외된 광주 모 대학의 한 시간강사는 결국 자살을 택했다. 그런데 교수 임용을 미끼 삼아 논문 54편을 대필시켰던 ‘교수님’은, 과연 처벌이라도 받았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대학은 “자기 사람”을 보호해주는 데에만 바빴고, 법원은 유가족들의 손해배상 소송을 기각해버렸다. 지속적인 착취를 당한 시간강사의 자살이 그저 “교수 임용 실패에 대한 좌절감”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 판시한 거다. 극단적 선택을 해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어도 대학에서의 사적 착취나 대필 강요 피해자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공적 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수십 편의 논문 대필을 강요당하거나 여러 권의 저서에 대한 저작권을 편취당하는 한국 대학의 수두룩한 피해자들에 비해서는, 내가 입은 피해는 새 발의 피다. 내가 얼마간 하게 된 무급 노동은, 한국 대학에서는 그저 ‘일상’에 불과하다. 이 무급 사역의 양이 지나치면 가끔 언론에서 관심을 나타내지만 ‘적당한’ 사역은 ‘관행’의 미명하에 계속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서울의 한 대학에서 한 대학원생이 한 해 동안 약 8만장에 이르는 저술들을 스캔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 이 양이 하도 과도하기에 언론에서 잠깐 보도했다. 물론 학생에게 이 현대판 “8만대장경 사업”(?)을 시킨 ‘교수님’은 처벌은커녕 아마 징계조차 받을 일이 없을 것이다. 해당 대학의 인권센터마저도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이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대학 생활의 당연지사인데, 왜 별도로 공을 들여 조사까지 해야 하겠는가?
한국 대학이 기본적인 인권이나 노동권이 존재하지 않는 범죄구역이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답은 자명하다. 기초적인 공공성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사립대학의 경우에는, ‘오너’ 일가나 재단 유력자들이 대학을 사적 소왕국처럼 경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노동권이나 인권 침해의 빈도로 봐서는 사립대학과 공립대학의 차이는 거의 미미하다. 즉, 국가가 명목상 대학의 주인이 되어도, 국가 자체도 대학의 공공성을 보장할 만큼의 공공성과 합리성을 보유하지 못한다. 재벌들의 돈을 사적으로 거두고 그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대기업의 ‘고민 해결사’로 전락한 국가가, 대학의 공공성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결국 대학가 소왕국들을 본질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피해자들의 연대와 투쟁뿐이다. 각자 혼자 당하지 말고 착취자들의 소행을 공개하고 같이 집단적 대응에 나서는 것부터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대학가는 긍정적 의미의 ‘문화혁명’을 필요로 한다. 일상적 갑질의 모든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에게 당당하게 함께 “노”라고 하며, 대학 운영의 민주화와 인권·노동권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그런 혁명 말이다.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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