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 사회의 인권 상황이 인권을 존중한다고 믿는 국민은 셋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인권침해 비율 중 노동권 침해 비율이 제일 높다는 응답이 나왔다. 한국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결과다. 대표적인 차별로는 성차별, 연령 차별, 학력·학벌 차별이 꼽혔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이 침해되고 차별이 자행되는 근본원인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1위가 경제적 지위, 2위가 학력·학벌이라는 응답이 나왔다. 경제 자본과 문화 자본, 이 두 자본의 불평등이 한국에서 인권침해의 심층구조를 이룬다고 국민들이 믿고 있는 것이다. 인권침해와 차별을 저지르는 주체에 대해서 사람들은 정치인, 검찰, 군대 상급자, 경찰, 직장 상사를 열거했다.
최근 국가인권위원회가 <2016년 국민 인권의식 조사>를 펴냈다. 인권위는 2005년부터 국민인권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서울대 정진성 교수가 연구책임을 맡았던 2011년 조사에서 체계적인 틀이 잡혔고, 성균관대 구정우 교수가 이끈 이번 조사는 방법론적으로 진일보한 모습을 보인다. 미디어의 사건 보도 혹은 인권운동가들의 주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한국인이 생각하는 인권관을 보여주는 연구다.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인권에 초점을 맞춰 전 국민을 대상으로 전문적 조사를 실시해온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인권 침해를 해결하면 되지 구태여 인권의식 조사가 왜 필요한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민주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실제로 이해하고 느끼는 인권을 파악하지 못하면 인권 관련 정책이나 행동이 탁상공론에 빠질 수 있다. 또한 국민이 어떤 사회적 고통을 ‘인권 문제’로까지 절실하게 인식한다면 국가는 그런 고통을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책무가 생긴다.
국민의 인권의식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문제의 증상보다 더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인권침해의 근본원인을 찾아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이런 노력 없이 대증요법에만 치중한다면 동일한 성격의 인권문제가 형태만 달리한 채 반복되기 쉽다. 또한 대중의 인권의식은 그것의 현실적인 영향력 때문에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어도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때엔 구체적 효과를 내기 어렵다. 아무리 좋은 정책 아이디어가 있어도 사람들이 호응해주지 않으면 시행하기 어렵고 추진력도 확보할 수 없다. 정리하자면, 인권이 절대적 규범성 위에 성립되어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것을 실행하려면 주권자들의 의식과 선순환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15살 이상 국민 1504명을 대상으로 한 이번 인권의식조사는 여러 면에서 흥미로운 결과를 보여준다. 우선 일반 국민 네 명 중 한 명만이 인권이라는 용어를 친숙하게 받아들였다. 대다수 사람에게 인권은 아직도 낯설고 먼 개념이다. 그리고 인권을 자주 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절대다수가 텔레비전이나 뉴미디어를 통해 인권을 받아들였다. 인권 선진국 국민들도 인권을 일상적으로 흔히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 경우엔 자국의 현실이 비교적 양호한 까닭에 인권을 상기해야 할 필요성이 낮아서 그렇게 됐을 개연성이 있다. 하지만 한국이 그런 수준의 나라인가. 아니라면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이와 연관해서 한국 국민들은 전반적으로 국내외 인권 상황에 대한 인지도가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인권교육의 필요성을 강하게 암시하는 대목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인권 상황이 인권을 존중한다고 믿는 국민은 셋 중 한 사람에 불과했다. 이렇게 믿는 사람 중에서도 남성이 여성보다 10%포인트 정도 더 높았다. 여성으로서 한국의 인권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열에 세 사람이 채 안 되었다.
상대적으로 인권이 잘 존중되지 않는 영역에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공공행정에 참여할 권리, 개인정보 보호, 사회보장권, 노동권 등이 포함되었다. 여성, 아동·청소년, 노인을 제외하고 대다수 취약집단에 속한 사람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전과자, 성소수자의 인권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했다. 인권침해 비율 중 노동권 침해 비율이 제일 높다는 응답이 나왔다. 한국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결과다. 대표적인 차별로는 성차별, 연령 차별, 학력·학벌 차별이 꼽혔다.
세 사람 중 두 사람 이상이 사형을 존치하자고 했고, 얼추 비슷한 비율의 사람들이 범죄 피의자의 얼굴 공개에 찬성했다. 국민의 과반수가 국가보안법을 유지하는 데 찬성했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면 안 된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두 사안 모두에서 젊은층의 의견은 좀더 전향적이었다. 또한 2011년에 비해 두 사안 모두에서 보수적 여론이 줄어든 점이 눈에 띈다. 특히 정부기관의 개인정보 수집·조사에 대해 사생활 침해의 이유로 반대하는 여론이 훨씬 더 높았다. 집회 및 시위의 권리를 지지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많았다.
경제·사회적 영역에서는 대중의 진보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열에 여덟 명은 비정규직의 차별에 반대했고, 시간당 6470원인 현행 최저시급을 인상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이 무려 91.4%나 되었다. 국민 다수가 사회보장의 확대에 찬동했으며 고소득층의 차별적 의료보장에 분명한 반대 입장을 드러냈다. 부양의무자 규정을 폐지하는 문제에선 찬반 의견이 나뉘었다.
여타 사회적 이슈에서는 찬반이 함께 표출되는 경향이 나타났다. 아동·청소년을 체벌해도 된다는 사람이 48.7%, 외국인 노동자의 가족 입국을 허용하자는 사람이 56.7%, 난민 수용 찬성 국민은 절반 미만, 성소수자의 성적 지향성을 존중하자는 사람은 54.2%로 나왔다.
북한인권 문제에 대한 국민의식도 밝혀졌다. 국민 네 사람 중 세 사람이 북한인권법을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대북 인도적 지원 문제에선 무조건 지원하자(26.2%), 투명성을 조건으로 달아 지원하자(41.6%), 즉 국민 셋 중 두 사람 이상이 인도적 지원에 찬성했다. 절대 지원하지 말자는 사람은 28.6%에 그쳤다. 북한인권 향상을 위한 정부의 최우선 과제에 대해서는, 통일에 대비한 인권정책 수립(32.7%), 인도적 지원정책 개발(26.7%), 북한인권 상황 조사 및 침해사례 수집(18.8%), 국제사회 관심 제고(16.5%)라는 응답이 나왔다. 요컨대, 60%에 가까운 국민이 미래지향적 정책과 인도적 지원을 통해 북한인권 문제를 해결하라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조사엔 초등학교 5학년 이상부터 중학교 3학년 이하 학생 542명도 별도의 조사 항목에 포함되었다. 초등학생은 친구와의 네트워크가 높을수록, 중학생은 교사와의 네트워크가 높을수록 인권침해를 덜 저지르는 것으로 나왔다. 가정 내에서 인권침해와 차별을 경험한 학생은 학교에서 본인 스스로 인권침해와 차별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또한 타인의 인권을 침해할 가능성도 높았다. 초등학생들도 성적에 의한 차별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으며, 외모 때문에 인권침해를 당한다는 응답이 많았다. 초등학교 때에 이미 학내에서 성추행을 당했다는 응답도 많았다. 교육당국과 교사들이 이번 조사를 잘 분석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들은 우리에게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우리 사회에서 인권이 침해되고 차별이 자행되는 근본원인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1위가 경제적 지위, 2위가 학력·학벌이라는 응답이 나왔고, 그보다 한참 떨어진 수준으로 장애 및 전과 여부가 꼽혔다. 경제 자본과 문화 자본, 이 두 자본의 불평등이 한국에서 인권침해의 심층구조를 이룬다고 국민들이 믿고 있는 것이다. 인권침해와 차별을 저지르는 주체에 대해서 사람들은 정치인, 검찰, 군대 상급자, 경찰, 직장 상사를 열거했다. 이 집단들에 대해 특단의 대책이 필요함이 거듭 입증된 셈이다.
공공·민간 기관의 인권보장 노력에 대한 문항도 있었다. 최고 조직으로 시민단체·엔지오가 꼽혔고 국가인권위원회와 국민권익위원회가 그 뒤를 이었다. 최악의 조직으로 청와대와 국회가 뽑혔고 그다음으로 국가정보원과 법무부·검찰이 지목되었다. 그간의 행적으로 보아 놀랍지 않은 답변이긴 하나, 여전히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어떤 개혁이 필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조사를 보고 내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다수의 한국인은 인권을 명시적으로 인지하진 않지만, 인권이 궁극적으로 정치와 민주주의 및 삶의 질 문제임을 직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비교적 실용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이며 반차별적인 인권관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세대간 차이가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시간은 인권의 편이 아닌가 한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