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의 미국, 푸틴의 러시아, 아베의 일본, 그리고 시진핑의 중국이라는, 국가주의로 치닫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오늘의 한반도는, 세계질서의 동향을 읽지 못한 채 친청, 친일, 친러, 친미로 마치 코끼리의 다리 하나씩을 붙들고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구한말의 매판적 지배집단을 되돌아보도록 요구한다.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발기인 “도널드 트럼프와 마주한 유럽인들”이라는 제목의 2월5일치 <르몽드> 사설은 엄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사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유럽인들은 알게 됐다. 도널드 트럼프는 유럽연합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유럽연합의 해체를 예언했다… 트럼프씨는 유럽에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최초의 미국 대통령이다. 유럽연합의 27개국은 정교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비겁한 정치는 재앙이 될 것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등장이 가져온 충격파를 강렬하게 느끼는 곳은 유럽이다. 러시아의 푸틴과 가깝다고 하지만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브렉시트를 칭찬하면서 유럽 각국의 극우 정당들을 응원하는가 하면, 유로가 저평가되었다고 독일을 맹공격하는 미국 대통령의 출현을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공업지역(러스트 벨트)을 재건하고, 4750억달러에 이르는 무역적자를 줄이겠다는 트럼프의 극단적인 미국우선주의와 보호주의가 2차대전 이후 세계질서의 근간인 대서양 양안 관계의 전략적 중요성마저 흔드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르몽드>가 위 사설에서 “유럽연합에 교훈은 분명하다. 국방에 있어서 최소한의 자주성을 갖추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천명할 만큼. 이처럼 유럽 통합에 기여하고 지지해온 미국, 그리고 미국과 함께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중심부를 차지해온 유럽의 관계가 70여년 동안의 황금기를 마감하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시선을 국내로 돌려보면, 2월3일 한국을 찾은 제임스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이 한민구 국방장관을 만나 ‘핵우산’ 제공 등 한국 방위 공약을 재확인하고 주한미군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를 올해 안에 배치하기로 했다고 한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처음 연 한-미 국방장관 회의에서 3월에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 ‘키 리졸브’를 강화된 형태로 실시하기로 했다고 <한겨레>는 전하고 있다. 또 2월7일에는 윤병세 외교장관과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첫 전화 통화에서 “계획대로 사드 배치를 추진해나가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외교부가 밝혔다. “주한미군 사드 배치는 오직 북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적 조치이며 다른 국가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인식하에” 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는데, 사드 배치에 강하게 반발해온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발언이다. 국제적으로는 세계 질서의 주요 축이 흔들리고 국내적으로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대통령 탄핵 국면에 있는데 외교·국방장관의 입에서는 판박이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미국이 주조한 판이라는 것은 오래된 비밀. 30년 동안 북한에 비해 30배의 국방예산을 쓰면서도 전시작전권을 환수받지 못하는 그들에게 ‘최소한의 자주성’을 요구하는 것은 연목구어겠다. <한겨레>와 <르몽드> 두 신문을 교차하면서 내게 다가온 생각은 허허롭게도 “미국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부류에 관한 것과 ‘우물 안 개구리’라는 두 가지였다. 미국에 가면서 “나, 이번에 미국에 가!”라고 말하는 대신 “나, 이번에 미국에 들어가!”라고 말하는 한국인이 적지 않은데, 미국이 자기 나라라는 게 내면화되어 자연스럽게 “미국에 들어간다”고 말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부류에게 성주군민과 김천시민, 원불교도를 비롯하여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다수 국민은 보이지 않을 것이다. 주권자인 국민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고 염치도 없는. 그렇지 않다면, “대통령이 탄핵 소추된 상황이니 추이를 보고 논의하자”고 비켜갈 여지가 있음에도 사드 배치를 밀어붙이는 그들의 행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트럼프의 미국, 푸틴의 러시아, 아베의 일본, 그리고 시진핑의 중국이라는, 국가주의로 치닫는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오늘의 한반도는, 세계질서의 동향을 읽지 못한 채 친청, 친일, 친러, 친미로 마치 코끼리의 다리 하나씩을 붙들고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던 구한말의 매판적 지배집단을 되돌아보도록 요구한다. 2월7일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 장관은 “(트럼프 행정부가) 일본이나 독일보다 안보의 약점을 더 안고 있는 한국을 상대로 ‘살계경후’(닭을 죽여 원숭이한테 겁을 준다)를 시도할 가능성에 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그에 따르면, “사드의 한국 배치는 미-중 간 전략적 대결구도의 핵심 부분”이고 “배치의 배경과 기술적 측면을 중국에 설명해 설득한다고 풀릴 문제가 아니다.” 결국 우리가 미국과 중국의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의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인데, 나의 우려는 그가 말한 경고의 수준을 뛰어넘는다. 무엇보다 북의 미사일을 요격한다는 사드의 성격이 전쟁 상황을 전제하고 있어서다. 창과 방패 사이의 모순이 끝없는 상승작용을 일으킬 때 죽어나는 것은 남북 민중이다. 또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과 마찬가지로 강대국 사이의 갈등 또한 약자의 희생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정리되는 게 국제 현실이다. 사드는 한국이 땅만 내줄 뿐 미군의 전략적 자산이며 아직 배치되지도 않았는데 중국의 경제보복의 화살은 미국이 아닌 한국에 이미 꽂히고 있다. 앞으로 미-중 사이의 무역전쟁이나 남중국해 갈등, ‘하나의 중국’과 대만 문제, 센카쿠(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중-일 갈등이 날카로워진다면? ‘아랍의 봄’ 뒤에 전쟁 참화를 겪고 있는 시리아 다음으로 지구상 어딘가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면? 정밀 타격의 유혹이 최소한 국지전을 일으켜 한반도를 덮칠 수 있다는 무서운 상상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차라리 양치기 소년이 되겠다!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최근에 펴낸 책 <사드의 모든 것>에서 “사드는 북핵 대처에는 무용지물이며 한국의 이익에는 백해무익하다”고 힘주어 말한다. “성주에 사드가 배치되면 2천만의 국민의 안전을 더 굳건히 지킬 수 있다”는 국방부의 주장과 전면 배치된다. 한국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의 말이 진실에 가까운지 알아야 한다. 정 대표는 머리글에서 사드에 찬성하는 사람들과 대선 후보들을 포함한 정치인들과 참모들에게 일독을 권했다. 이재명 후보와 정의당의 심상정 후보가 사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는 데 반해, 안철수 후보는 모호한 ‘조건부 사드’를 주장했고, 안희정 후보는 사드 수용 의사를 밝혀 주목을 끌었다. 국익을 최우선시한다는 안희정 후보는 개인적으로 사드에 동의하지 않지만 “이제 와서 뒤집는다는 건 쉽지 않다”며 “전통적 한-미 전략적 관계를 그렇게 쉽게 처리하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미국 우선주의로 취임한 지 보름도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거둬들이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나프타)의 재협상을 요구하고 대서양 양안 관계를 흔드는 트럼프의 눈에 ‘한국 대통령 안희정’은 어떻게 비칠까? 대세론의 수혜자인 문재인 후보는 1월15일자 <뉴시스>와 한 인터뷰에서 “사드 배치 결정을 취소한다는 방침을 가지고 다음 정부로 넘기라는 것이 아니다. 한-미 간 이미 합의가 이뤄진 것을 그렇게 쉽게 취소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분명하지 않음’에는 지난번 이 칼럼난을 통해 제기한 결선투표제가 요구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담겨 있다. “나는 차선으로라도 유권자 과반수의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국민에게 했던 공약을 지켜야 한다”고 조금은 더 당당히 말할 수 있을 테니까. 대통령 후보라면 사드 배치와 같은 중대한 의제에는 분명한 의사를 밝혀야 마땅한데 결선투표제는 그런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연재홍세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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